모리의 집에서 지낸 지 한 달 넘긴 주말에 우리는 처음으로 그간의 계획 중 하나를 이행했다.
전날 알람을 맞추었고, 내가 먼저 일어났다. 나는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며 거울로 통해 뒤에서 잠자는 모리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모리가 예고 없이 눈을 스르르 떴다. 모리는 내가 바스락거리며 외출 준비하는 소리에 잠이 깨, 침대에 누운 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해? 아침 일찍부터.” 모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뭐 하긴. 모르는 척하지 말고 빨리 나갈 준비해. 이 게으름뱅이야.” 나는 모리에게 으름장을 놓았고 모리는 이불속에서 얼굴만 내밀고 내가 머리 말리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2월의 아침 공기는 그라인딩밀로 잘게 분쇄된 얼음 입자가 대기 중을 떠다니는 듯이 너무나 차서 우리는 밖으로 나온 것을 후회했었다. 침엽수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었고, 차오르는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평평한 바위에 앉아 우리가 사는 도시를 내려다보았었다. 그때 모리가 보여준 엽서는 구엘 공원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대학 친구 중에 바르셀로나에 사는 애가 있어. 햇빛 좋은 나라가 잘 어울리는 유쾌한 사람이야. 대학 다닐 때 친구들 네다섯이 의기투합해서 스페인이든 프랑스든 예술적인 나라의 예술적인 도시로 가서 분위기 있게 살아보자 했는데, 결국 실행하는 건 한 명이 됐지. 그 친구는 몽상가 타입은 아니었어. 그저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거지.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내가 거절한 이유는 내가 생각해도 단순하고 어이없는 한 가지였어. 바르셀로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도시라는 결론이었거든. 난 떠들썩한 사람들과 쨍한 햇살을 싫어하니까. 그래도 한 번쯤 놀러 가는 건 경험도 되고 재밌을 거야.”
“응. 재미있을 거야. 나랑 같이 가면 더 재미있을 거야. 난 예전부터 스페인 좋아했어. 가우디랑 플라멩코랑 고야. 난 투우도 잘할 자신 있어.”
나는 빨간 천을 들고 그것을 절도 있게 휘두르는 나와 모리를 상상했다. 유황색의 모래가 깔린 원형의 경기장에서 나는 일찌감치 도망쳤고, 모리는 근육질의 거대 황소를 제압했다.
“모리군, 그 엽서를 나에게 줄래?” 이렇게 말하긴 했어도 그의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빼앗아 갖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나를 빤히 보았다. 그의 눈빛은 ‘네가 합당한 이유를 말해야 이걸 주겠어.’하고 요구했다. 내가 “뭐, 그냥.” 하고 얼버무리자, 모리는 “안 돼. 친구가 모처럼 보내준 건데, 나에게 보낸 거지 너에게 보낸 게 아니잖아.” 하고 손자를 훈육하는 할아버지처럼 엄하게 얘기했다.
“주기 싫으면 주기 싫다 그러면 되지, 날 나무라는 거야? 그래도 나는 의기소침해지지 않아. 날 괴롭힐 수 있다 생각했다면 너 크게 잘못 생각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되게 엉덩이를 툴툴 털며 의기양양한 기세로 말했다.
“오, 그래? 어디 두고 볼까? 나는 안나 괴롭히기를 목표로 삼은 사람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에 힘써야겠네.” 나와 모리는 엽서를 뺏고 다시 빼앗기고를 반복하며 놀았고, 나중에는 그 놀이에 푹 빠져 진짜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번번이 교묘하게 피하며 나를 약 올리던 그는 어느새 나에게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엽서를 들고 있었다.
“대신 한 번만 볼게.” 그 엽서에도, 그의 친구에게도 관심이 없었지만 모리가 나를 놀리는 취미를 갖는 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모리가 우쭐대며 서있는 언덕으로 올라가 일부러 양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엽서를 받았다. 엽서엔 ‘Barcelona, Cataluña, Spain’이 집주소인 발신자가 ‘놀러 오지 않을래?’ 하며 모리를 부르고 있었다.
모리의 친구 분께
안녕하세요. 다급한 마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이제부터 편지의 목적을 군더더기 없이 말하려고 합니다. 무례하게도 형식적인 인사말은 생략하게 됨을 양해해 주세요.
모리가 실종되었어요.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지인들 모두에게 거처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모리와 헤어진 날의 정황을 보아 실종이라기보다 숨었다고 해야 옳을 거예요.
그는 어쩐지 저에게 잔뜩 화가 나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어떤 화의 기미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그의 태도 변화의 이유를 모른 채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날은 여느 때완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마 제게 화를 냈던 날이 기점이었을 거예요. 그날 이후로 전 모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그는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루하루 모리를 찾아다니던 나날의 연속 중에 번뜩 이 주소가 떠올랐습니다. 모리가 자신의 친구에게서 온 스페인발 엽서를 보여주었을 때 자연스레 외워버린 주소였습니다. 그가 ‘한 번쯤은 놀러 가도 좋겠지.’하고 가볍게 흘린 말에 매달려, 때마침 대두된 한 가지 가능성에 과도한 필연성을 엮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모리가 그곳에 도착했나요? 모리가 어디로 떠났는지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어요. 저는 물론이고 모리의 회사 동료 분들까지 걱정이 큽니다. 빠른 답변을 주신다면 그 대답이 무엇이든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유익한 정보를 가지고 계신다면 서슴지 마시고 꼭 제게 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8월의 첫날, 모리의 친구 안나로부터
편지를 완성하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편지봉투에 꼼꼼하게 봉해져 상대에게 전해질 말들에 대한 확신이 생길 때까지 퇴고를 반복해야 했다. 비로소 편지봉투에 편지를 넣었을 때는 일종의 체념이 생겨난 상태였다. 형식 갖춘 소개조차 받지 못한, 두루뭉술한 관계의 사람에게 속마음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 희미해진다.
오늘 밤 잠을 푹 자고 나면, 내일은 한 가지 중요한 구실로 하나의 사소한 일을 해치우길 나는 바라고 있다. 세계가 빙글빙글 도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침대에 눕는다. 이것은 교만하게 주량을 초과하여, 한 병의 와인을 다 비운 뒤의 부작용 혹은 실종상태의 ‘사랑’에 대한 섭섭함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