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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Sep 30. 2024

Songs My mother taught me

평생 잊지 못해

 정오를 몇 분 지나쳐 울린 초인종 소리에 몸을 우뚝 일으킨다. 손님이 온 적 없어 내가 이사 오고 처음 울리는 인터폰의 벨소리가 반항하듯 ""하고 울렸다.


 방금 청소를 끝내고 책상에 앉아 쓰던 편지가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앞부분만 펼쳐보다 결국엔 내팽개쳐진 여러 권의 책들 중 가장 두꺼운 것을 골라 미완성의 편지를 밀어 넣는다. 의자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너무 정돈되어 모델하우스처럼 무정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이것이 방문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빠르게 스치며 본 인터폰 모니터 안의 얼굴은 당연히 엄마였다. 내가 문을 빼꼼히 열며 ‘누구세요?’ 하는 표정을 짓자, 엄마는 ‘허튼짓 말고 어서 문이나 열어.’ 하는 표정으로 맞대응한다.


 나는 금방 꼬리 내리고 환하게 웃으며 문을 활짝 연다. 엄마의 손엔 여러 사이즈의 봉투가 힘겹게 달려있다. 나는 그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봉투들을 내 손으로 옮겨 든다.


 “우와, 뭐가 이렇게 많아? 먹을 거 잔뜩이네. 신난다.” 나는 실실 웃으며 엄마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엄마의 얼굴 앞에 나의 얼굴을 들이민다. 엄마는 오랜만에 만나 귀여움을 떠는 딸이 사랑스럽지도 않은지, 멍청하게 웃고 있는 나를 무심히도 지나쳐 손에 들고 있던 모든 짐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나도 엄마를 따라 무거운 짐들을 식탁에게 떠맡긴다.


 네모 모양의 커다란 플라스틱 통이 담긴 봉투는 하얀 비닐이 투명해질 정도로 늘어나 있다. 분명히 엄마표 김치가 꾹꾹 눌려 담겨있겠지. 다른 봉투들에는 점심을 위해 봐 온 요리 재료들이 있다. 바다 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바다에서 나는 생물은 먹어 본 지 오래되어 생소하기만 하다. 다른 봉투들보다 작은 것에는 올망졸망한 귤들이 망에 쌓여 있다.


 “귤도 사 왔네. 내가 먹고 싶다고 말했었나? 오늘 아침에 갑자기 귤이 먹고 싶었는데, 이상하지? 나 원래 귤 안 좋아하잖아.” 나는 오렌지색 망을 잘라 나무 바구니에 귤들을 옮겨 담는다. 귤들의 모양과 크기는 복제한 듯 동일하지만, 색깔은 오묘하게 달라서 노란색 명도표를 만들 수도 있겠다.


 “어제 전화로 귤 먹고 싶다고 한 거 같아서 사 왔는데, 너 안 그랬니? 그럼 잘 됐다. 얘.” 엄마는 어제 나와 통화하는 동시에 레이더망을 돌려 오늘 아침엔 내가 귤을 먹고 싶어 할 것을 감지했다. 엄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의 ‘상태 해석 분야’에서 알게 모르게 이골이 난 사람이다.


 엄마는 소파 안으로 푹 꺼져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다가가 소파 앞의 탁자에 앉아 가까이서 엄마를 마주 본다.


 “힘들어? 오늘 점심메뉴는 뭐야? 엄마 힘들어 보이니까 이런 말하기 미안하네.” 나는 괜스레 엄마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만져본다.


 “괜찮아. 힘들지만 너한테 맡길 수도 없고. 좀 있다 해물탕 끓일 거야.” 엄마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한다. 엄마는 사소한 몸 쓰는 일에도 쉽게 고단해 하지만 병약한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아픈 것도 내가 할 건 다 끝내고 아파야지.’ 하는 야무진 속내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금방이라도 소파에 누워버릴 기세로 몸에 힘 하나 없이 앉아있었으나 이내 일어나 부엌에 섰다. 엄마는 부엌을 뒤적거리고 물을 사용한다. 도마 위로 칼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보글보글 하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얼마만인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만에 엄마와 점심을 먹는다. 우리 둘만의 식사시간은 침묵이 규율이라서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마저 다 먹고 얘기해.’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정도이다. 맛있게 먹다 보니 흰 티셔츠에 빨간 국물이 잔뜩 튀어 버렸다.


 “너 칠칠치 못하게. 자국 남기 전에 어서 물에 담가 놔.” 엄마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어 온화하게 미소 짓는다.


 해물탕에 들어간 매운 고추 때문에 입안과 입 언저리가 다 얼얼하다. 입에 찬 물을 머금고 그릇을 닦기 시작한다. 엄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앉았던 소파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귤을 까먹고 있다. 멍한 표정에 느리게 손을 움직여 귤을 입에 넣는 엄마는 개구쟁이 이탈리안 소년처럼 사랑스럽다.


 설거지 중에 공연히 “엄마” 하고 불러본다. 엄마는 아무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무슨 일이냐는 듯 소파에서 일어난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 치며 “아니야. 그냥 불러봤어. 쉬고 있어. 마저 다 하고 갈게.”라고 말한다. 나의 말에 엄마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다시 자리에 앉는다.


 여름의 낮은 비상식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길어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불합하는 이질적인 풍경으로 인해 사람들은 곧잘 놀란다. 그러다가도 어느 전환점만 지나면 밀려온 해수가 빠져나가듯, 시간의 흐름에 이끌려 해가 저물고 서서히 조명 없이 앞을 보는 것이 갑갑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에 불을 켠다. 노란 불빛이 주위를 아련히 비치자 한밤중 잠들기 전처럼 포근함이 느껴진다. 엄마와 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지는 해를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느덧 석양의 찬란함은 없어지고 공명의 남색뿐이다.


 “엄마, 난 모리를 많이 좋아하잖아. 그래서 모리가 떠난 것에 많은 슬픔을 느껴. 근데 내가 다행으로 여기는 건, 모리가 나뿐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에서 떠나 버린 거야. 유치하지만 난 그래서 참 안도했어. 어쩌면 나의 잘못은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합리화가 가능하기 때문이야. 현명한 대처를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 방법은 전혀 모르겠어.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어두워지기 전에 모리의 일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지만, 역시 해가 밝을 땐 용기가 나질 않았고 하루의 8할이 지나서야 천진함을 의도하여 그리 큰일도 아니란 듯이, 하지만 나로선 간신히 입을 떼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해. 모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어떤 심리 상태였는지를 네가 파악해야 해. 넌 아직 어리지만 모리는 서른 가까이 되었고, 또 너와는 다르게 사회생활을 하니까 네가 알아차릴 수 없었던 부분이 많았을 거야. 그렇다 해도 너와 모리가 함께 한 시간만큼 너는 모리에게 작용했고 모리는 그걸 받아들이며 자신 고유한 영역이 흔들림에 거부감을 느꼈을 텐데, 그것들이 점점 모리를 지치게 만들었는지 몰라. 모리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오직 모리에서 네 쪽으로 일방적인 영향을 미치진 않아. 그 사람이 너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는 거야. 넌 주의력이 강한 사람이지만 모리에게는 어리광만 부리지 않았니? 네가 어리광이라고 생각한 투덜거림이 모리에겐 큰 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거고. 이젠 점점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분명히 모리는 네가 달라지기를 바라고 있을 거야. 모리와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면 모리가 힘들어하는 부분들을 너도 같이 감당해 주어야지. 모리 혼자는 도저히 힘들어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일들을 말이야.”


 엄마는 침착하게 나를 나무라고 있다.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엄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지나치게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것이다. 엄숙한 표정을 한 엄마는 사사로운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직 애 같은 면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일지는 몰랐어.” 나는 변명처럼 말했지만 내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인식이 나 스스로를 보잘것없게 만들었다.


 “어머, 얘. 너 아직 애야. 혼자서도 멀쩡해야지. 아무래도 모리가 널 위해 이러는 가보다.”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는 싫은 듯 머리를 흔들어 엄마의 손을 떨쳐냈지만, 엄마가 다시 내 머리로 손을 뻗자 나는 가만히 그 손에 머리를 맡긴다.




 오늘도 해는 위풍당당 떠오르고 나는 얇은 눈꺼풀을 뚫고 비쳐오는 햇살의 눈부심을 느끼며 잠에서 깬다. 엄마 역시 깨어나서 나의 옆자리에 누워 눈뜬 기척을 내고 있다. 어젯밤 엄마와 나의 이야기는 새벽 3시를 넘기고 나서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잠이 들어 끝이 났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후 처음으로 엄마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


 “엄마, 아침 밥 해줘.” 어제 점심 이후에 귤 몇 개를 까먹은 것이 다여서 배가 몹시 고프다.

 “엄마도 배고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네. 뭐 해 먹을 만한 게 있나? 아침거리 하나도 없는데, 뭐 해 먹지?”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엄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외박할 계획이 아니었던 엄마는 조금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조용해진 집에서 어젯밤의 대화를 곱씹어보니, 모리를 위해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긴다.


 책상에 앞에 앉아 손바닥만 한 메모지 한 장을 꺼내고 오른손에 펜을 잡는다. 동작을 방해하는 두꺼운 책들을 옆으로 밀자, 그 사이에서 납작해진 편지가 팔랑거리며 생사여부를 밝힌다. 신나게 노느라고 잊고 있었던 방학 숙제 더미를 떠올린 아이처럼 골머리가 지끈하다.     

 

 모리를 되찾기 위한 행동 강령

1. 그를 추적 (모리의 빵 조각을 쫓아가는 것)

2. 그의 가족과 친한 친구 만나기

3. 나를 단련시키기 (엄마의 조언에 따라서 어른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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