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아 Sep 23. 2024

호랑이와 여우 같은 관계

평생 잊지 못해

 “네. 저번 주 토요일에 그의 집에서 나왔어요. 통 연락이 안 돼서 오늘은 ‘찾아 나서야지.’ 하고 여기에 온 거예요. 당연히 회사엔 출근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여기 아니면 모리가 있을 만한 곳을 아무 데도 몰라서 관장님께는 아무 도움드리지 못해요.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죠. 저는 바깥의 모리에 대해선 아는 게 없으니까요”


‘못해요. 없어요.’ 하는 말을 마치고 나니, 내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을 실감한다.


 그녀는 “가볍게 선생님이라고 하세요.” 하고 호칭을 정정하며, “그럴만해. 모리 녀석, 원래 소중한 것은 숨겨두니까. 요즘 모리가 이상해졌었는데 알고 있었나요?”라고 병의 증상을 묻는 의사처럼 말했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흔든다. 역시나 그는 나에게서 숨겼던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세계에서 나를 철저히 몰아냈다. 나는 이 여자에 비해 모리를 너무나도 알지 못한다.


 “모리의 그런 부분엔 예민하지 못했나 봐요. 전 모리와 함께 있으면 항상 즐거웠고 모리도 즐겁기만 바랐어요.”

 “아니야. 분명 티 내지 않았을걸. 안나를 보니 그날 생각이 나네."라고 운을 띄우며 은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랑 모리는 모리가 고등학교 입학한 해에 처음 만났어. 나는 모리 아버지 대학 후배라서, 모리가 어렸을 때는 가끔 만나는 일이 있었지. 그래도 성장한 모리를 보고 대화를 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귀여운 꼬마일 때는 본 적 있지만, 그때는 나도 어렸고 모리는 유치원의 노란 모자를 쓴 깜찍한 아이였고. 옛날 생각하면 지금의 모리는 실감이 안 나는 거 있지. 그날은 상림 선배가 대학 동창들과 나를 포함한 후배 몇 명을 집으로 초대했어. 오늘 같이 여름답지 않은 가랑비가 내려서 나는 우산을 받쳐 들고 선배 집으로 갔지. 예상대로 대저택이었는데, 외관은 으리으리한 데에 비해서 인테리어가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거야. 선배는 항상 대담한 화법에 스케일이 큰 작품만 고수했으니까 당연히 집도 선배답게 꾸몄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지. 근데 선배 와이프를 보니까 이해가 가더라고……. 얼마나 작고 보호본능이 일던지, 키가 큰 나는 상대적 이질감에 외경심까지 느꼈어. 집에 들어섰을 때 덩치 좋은 남자들 사이에 조그마한 여성이 앉아, 이 사람 저 사람 비유 맞추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다들 한잔하고 분위기가 떠들썩해 있었고, 그 자그마한 여자가 남자들 기세에 눌리지 않고 안주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어. 한눈에 멋있는 여자라는 걸 알았지. 나도 선배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 한바탕 웃고 떠들었고, 상림선배 와이프 수연 씨와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이야기를 나눌 겨를은 없었어. 그러다가 잠깐 바람 좀 쐬려고 정원으로 나가서 하늘을 바라봤는데, 건물 2층의 테라스에 웬 본 적 없는 핸섬한 청년이 서 있는 거야. 그때 내 가슴이 얼마나 빠르게 뛰던지! 그러다가 이성을 되찾고 생각해 보니까 모리 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소리를 지르며 말을 걸었어. 마흔 가까이 된 여자가 참 주책이었지.”


 그녀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옛 기억에 미소를 띤 채 눈으론 앞에 없는 과거의 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


 “난 ‘어머! 너 모리니?’라고 말했었어. 그 애는 ‘저 아줌마 누구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 알 만하지? 그 애 예전에도 지금처럼 살가운 맛이 없었어. 나는 호들갑을 떨면서 얘기 좀 하자고, 위로 올라가도 되냐고 묻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지. 몇 년 뒤에나 들은 얘기지만 모리는 그때 기겁을 했었대. 그럴 만도 하지. 본 적도 없는 성인여자가 소리나 질러대고 자기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니 말이야. 거실에 있는 상림 선배한테 ‘모리가 엄청 컸네!’ 하니까, 글쎄, ‘그 녀석이 집에 있어?’ 하고 놀라는 거야. 그러더니 선배는 구제불능이라느니, 이상한 녀석이라느니, 부정적인 말만 중얼거리고 나서는 모리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더라고. 사이가 좋지 않은 부자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위층으로 올라가니까 모리는 테라스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 아……. 그 모습이 어찌나 분위기 있던지! 그만 반해 버렸는데, 그게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글쎄 한동안 그 샤프한 앳된 얼굴이 꿈에서도 나왔었다니까! 아무튼 우리 둘은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서 한 시간도 넘게 이야기를 나눴어. 습기 가득한 공기에 끈적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지만, 어린 모리는 기분 좋게 이것저것 조잘댔어. 아마 그 모습이 내가 본 가장 들뜬 모리였을걸. 어릴 때부터 지금 못지않게 어른스러웠었고 역시나 모리는 고등학생답지 않았어. 모리답지?”


 은혜의 이야기를 들어도 ‘모리=어른’이 박혀있는 나의 머리로는 아직 완전히 자라지 않은 모리를 상상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고등학생 모리……. 상상은 안 되지만, 지금하고 많이 다르진 않을 거 같아요. 그때 모리는 어리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을 수도 있을 거예요.”


 “맞아, 맞아. 안나, 잘 아네. 바로 그 느낌이었어. 어른을 동경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무시하고……. 그 무렵 모리는 그랬지.”


 “그런데 아무리 모리라도 그런 대단한 아버지가 있으면 그 영향이 적지 않았겠죠? 아들은 좋든지 나쁘든지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응. 그렇지. 아무래도 상림 선배는 강압적인 사람이니까, 모리는 그런 거에 질려했지. 선배 만난 적 있어?”


 “아니요. 얼마 전에 전시회에도 데려가 주지 않았어요. 모리 아버지기도 하고 유명한 예술가시니까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모리는 혼자만 가버렸어요.” 나는 그 전시회 첫날에 모리에게 억지 부린 것을 떠올리고, 모리와 엇갈린 지금에 와서야 그런 사소한 잘못들을 후회해 본다.


 “이해해. 모리는 아버지라면 질색을 하니까. 질색한다기보다 항상 겁먹어 있지. 얼마나 불쌍한지 몰라.”


 “그렇지만……. 얼마 전에 모리가 아버지에게 그림 부탁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 두 사람 사이가 나쁘다면 서로 어떤 목적에서 그림을 그려주길 바라고 또 그걸 받아들인 걸까요? 모리와 가족들 사이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모리가 사라졌고,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지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이 일 한 가지니까…….” 나는 지금 의문을 품는 것들이 공허한 물음일지도 모름에 허무함을 느끼고 모리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음을 나의 잘못으로 여긴다.


 “응. 그 일은 나도 놀랐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부자지간의 유대감이라고 하기엔 그 둘은 왕래가 너무 없었어. 상림 선배는 아버지답지 않게 아들에게 관대하지 않았고, 모리는 아들답지 않게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못했어. 호랑이와 여우 같았달까. 하지만 그 둘 사이가 어째서 안 좋아진 건지, 나로서는 함부로 가늠하지 못하겠어. 아무래도 가족이 아닌 이상 알지 못하는 종류의 껄끄러운 문제가 있는 거겠지. 모리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나는 무얼 물어보거나 하지도 못했어. 선배는 곧잘 아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지만 그 말투는 탐탁지 않은 녀석을 가까이 두지 않은 채 감시하는 느낌이었고. 아무튼 이상한 부자라서 말이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녀의 혀끝 깊숙이엔 마저 게워내지 못한 말들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는 듯 보였다. 은혜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직접 알아내야 하는 것이 있는 것일까.


 “전 답답하기만 해요. 전 오직 저와 관련된 모리의 영역 안에서만 살아왔어요. 모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에 대해선 아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은혜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모리는 어쩌면 제가 아는 모리가 아닐지도 몰라요. 전 이런 상황이 비현실적이기만 해요. 모리는 행방불명이고, 그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마치 탐정놀이 하는 것 같네요.”


 “탐정놀이라……. 그래요. 모리가 그것을 원한다면, 뭔가를 알아내길 원한다면, 우리 함께 알아내 봐요. 나는 모리와 그 주변에 대해 모르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모리 자체만 아는 안나가 이번 일엔 유리할지도 모르겠네요. 궁금한 일 생기면 연락 줄래요?”

 그녀는 나에게 명함을 건넨다. 하얀 바탕에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만이 적혀있는 군더더기 없는 명함이다.


 은혜와의 대화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그녀는 선약에 늦었다며 서둘렀고 나도 그녀와 함께 응접실에서 나온다. 그녀는 부산스럽게 아틀리에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나중에 다 같이 모이자고. 안 돼. 안 돼. 나 오늘 바빠. 안나도 오늘 피곤해서 안 돼. 그렇지요. 안나? 그럼 수고들 해! 그럼 내일 보자고. 내일.”

 회식을 하자, 소개할 겸 술 한잔 하자, 모리씨는 어디 가셨냐, 하는 작가들의 쏟아지는 물음을 은혜는 속도감 있는 대답으로 탁탁 끊는다.


 그녀는 역 앞까지 태워다 준다며 나를 차에 태운다.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운전하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본다. 여유 있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능숙하게 운전하는 은혜가 나와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보는 여자임을 실감한다. 나는 운전면허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겁이 많아 운전은 해 볼 시도도 안 하고 쉽사리 포기했다. 이제까지 나의 이런 면을 부끄럽게 여긴 적 없었으나, 은혜와 비교하면 나는 심약한 무능력자에 불과하다.


 나는 여성으로 태어나 선천적 나약함을 핑계 삼아 다른 이에게 의존하려고만 했던 것일까. 그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는 결혼반지조차 끼어있지 않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녀는 나와 달리 혼자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꾸리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태어난 것일까. 나에겐 결여된 이런 자립의 특성들을 후천적 노력으로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이전 07화 응접실과 연못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