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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Sep 20. 2024

응접실과 연못

평생 잊지 못해

 “나한테서 나는 걸 거야. 정원 좀 살펴보고 왔거든. 매일 보살펴줘야 하고 정말 손 많이 가는 애들이야.” 그녀는 자신이 입은 리넨 소재 하얀색 블라우스에 밴 풀냄새를 킁킁 맡으며 말했다.


 “왜 또 괜히 싫은 소리 하세요?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선생님이 정원에 있는 큰 나무들은 물론이고, 자잘한 풀꽃들까지 엄청 아끼시거든요. 배 아파 낳은 자식들처럼 신경 쓰신 다니까.” 선영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의 앞 쪽에 선 여인이 “그렇게 정신병 수준은 아니거든!” 하고 맞대응하며 열을 내다가 “어머” 하고 민망해하더니, 이내 목소리 톤을 바꾸어 말을 잇는다.

 “안나, 정말 반가워요. 나는 은혜예요. 아까 말했듯이 내가 얼마나 안나씨를 보고 싶어 했는지 몰라요. 우리 차분히 앉아서 얘기 좀 해요. 선영. 응접실로 차 좀 부탁해. 뜨거운 거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은 서늘해서 몸을 움츠리게 된다. 냉방 온도를 다른 곳보다 낮게 설정해 놓았는지 공기가 유독 차갑다.


 “따라와요. 안으로 들어가서 단 둘이서만 이야기해봐요. 그건 그렇고, 나 많이 기다린 거 아니죠? 아까운 시간 쓰게 해서 미안해요. 정원을 지나오는데 웬 새가 내 나무에 구멍을 내고 있지 뭐예요. 마침 딱 좋게 핀 들꽃들도 좀 데리고 들어왔고요.”

 실제로 그녀에겐 미안한 기색이 그다지 없었지만, 그것이 실례라기보다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나 선영에게선 느낄 수 없는, 은혜의 여유로움에 차갑게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한소끔 데워져 모락모락 김을 낸다.


 “기다리지 않았어요. 모리 사무실도 보고 그림도 보고, 무엇보다 여기 찾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요.”

 은혜는 고개를 돌려 산책시키는 강아지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고 호호 웃는다. 좀 전의 웃음과 같은 초승달 모양으로 눈웃음을 짓는 그녀에게서 어린 여자아이의 천진함이 엿보인다. 이 웃음으로 스무 살은 어린 남자도 꾀어낼 수 있겠다.


 응접실은 모리의 방에서 반대된 건물 안쪽에 자리 잡아, 작가들의 작업공간을 모두 지나쳐 들어가야 한다. 빠른 걸음의 은혜를 뒤쫓아가며 스친 작업실의 그림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수준이 높은 것, 아직 습작 정도의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사람의 얼굴, 군중들. 풍경화, 추상화.

 그곳에서 작업 중인 작가들은 세 명이었다. 작업에 몰두한 사람과 나를 수상쩍게 쳐다보는 백인 남자 한 사람, 의아해하며 작업을 멈추고 인사를 하는 사람. 다 제각각이다.


 은혜는 나에 대한 소개도 해주지 않고 그들을 지나쳐 곧바로 응접실 문을 연다. 나는 무안해져 그들에게 목례로 인사하며 빠르게 걷는 은혜의 팔소매를 용케도 붙잡았다.

 “아참, 그렇지! 얘들아, 이분은 모리 애인 안나야. 저들은 우리 아틀리에 작가들이에요. 총 5명인데, 지금은 3명뿐이네. 우선 안나양과 나는 바쁘니까 궁금한 건 나중에 질문하도록 하시고, 지금은 작업들 계속하세요.”


 그녀는 응접실로 나를 들인 후, 소리 없이 문을 닫는다. 응접실은 예상보다 환하고 단순했다. 문 밖의 작업공간과는 다른 새하얀 형광등 조명에, 손자국이나 먼지 없이 깨끗하게 닦인 전면 유리로 햇살이 들어오고 이것을 통해 바깥의 정원이 보인다.

 정원엔 대나무들과 단풍나무, 능소화나무들과 수국,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달고 키 크게 자란 복숭아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키 작은 나무들이 깔끔히 자라 있다. 활동력이 절정에 달한 능소화 덩굴과 수국의 만개한 꽃송이에서 터져 나온 혼란한 생기가 여름에 휩싸인 도시의 들썩이는 밤 같다.

 반면에 키 작은 울타리들로 둘러싸인 연못은 어쩐지 움푹 파인 웅덩이만 있을 뿐 물이 채워있지 않고 바짝 마른 채여서 스산한 폐광을 연상케 한다.

 아틀리에의 입구에서부터 깊숙이 자리한 응접실의 뒤쪽까지, 이 건물은 정원으로 빙 둘러져 있다.


 “정원이 정말 예뻐요.” 무심코 플레이 버튼을 누른 것처럼 감탄이 튀어나왔다.

 “그렇죠?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어요. 아틀리에 명의나 직책은 내가 주인으로 되어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밖의 녀석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까, 내 마음대로 손댈 수 있는 공간은 여기랑 문 바깥의 정원밖에 없어요. 들어올 때 향냄새가 대단했죠? 거부감 있지 않나 모르겠네요. 하원이가 향이 없으면 작업을 못해서 그 아이가 들어온 후부터는 매일 24시간 향을 피워놓아요. 나도 애들이랑 같이 작업이라도 하는 날이면, 밤에 집에 돌아가서까지 어지럼증에 시달려서 잠도 못 자고, 그 다음 날은 만성피로에……. 아까 들어올 때 안나씨한테 인사한 새하얀 녀석이 하원이인데, 아주 괘심 하지만 구석구석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미워할 수는 없어요. 아! 미안, 미안. 여기 앉으세요.”


 응접실에 들어서면 마주하는 전면에 유리문을 설치하여 정원으로 통하게 하였는데, 이 정사각형의 방으로 입장하자마자 앞에 펼쳐진 전경에 푹 빠진 나는, 나도 모르게 투명한 유리 앞에 바짝 붙어있었다. 그녀는 계속 서있는 나에게 매너 좋게 의자를 꺼내주고 자신은 그 건너편에 앉는다. 우리는 응접실의 정 가운데 자리한 6인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다크체리색의 네모 각진 테이블은 가정 식탁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었을 테지만, 그 본분을 잊고 이곳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테이블과 의자는 같은 나무로 매끈하게 가공되어 본연의 나뭇결 외에는 어떠한 장식도 되어있지 않다. 맞은편 그녀만큼이나 기품 있는 테이블이다.


 “후…….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서, 안나씨는 스물한 살이죠? 모리에게 들었어. 말은 편안히 할게요. 그래도 되죠? 나는 이제 몇 달 지나면 백 년의 반을 살게 되니까, 사실 정말 늙었지.” 그녀는 감회가 새로워지는지, 테이블을 물결치며 두드리고 있는 자신의 왼쪽 손을 바라보며 살짝 웃는다.


 문이 열리고 선영이 차를 받힌 쟁반을 가지고 들어온다. 푸른빛이 도는 아담한 회색 도자기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선영은 같은 재질의 손잡이 없는 찻잔을 우리 앞에 각각 하나씩 놓아주고, 차 주전자를 내려놓는다. 그녀는 나를 보며 찡긋 웃어 보이고는 뒤돌아 문을 향해 걷는다. 그녀가 신은 굽 낮은 구두에서 딱딱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반응하여 은혜가 고개를 돌려 선영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자 은혜는 다시 나를 본다.


 “선영이는 항상 타이밍이 좋아. 저 아이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나 스무 살 때 이야기를 30분도 넘게 늘어놓았을 거야.” 그녀가 잠시 말을 중단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래. 모리가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는 거죠?” 하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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