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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Sep 13. 2024

의뢰받은 그림

평생 잊지 못해

 선영에게 나의 이미지가 ‘귀여운 미인’인 것은 유감스럽다. ‘나는 당신과 같은 타입이 아니에요.’ 하고 반론하고 싶었지만, 그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녀는 계속 말을 잇는다.

 “모리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 그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모리 오빠는 언제나 품위 있고 자상하죠. 3년 전에 대학 졸업하고 이곳에 처음 취직했는데, 정말 운이 좋았어요. 여기는 자유분방해서 나 같은 사람한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직장이죠. 그러고 보니 정말 3년이나 되었네요.” 선영은 머릿속으로 과거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듯 바닥을 보며 미소 짓고 있다. 선영은 작고 동그란 얼굴에 조그만 몸집을 가져서 인지, 이제 20살 갓 넘은 나이 어린 여자의 풋풋한 귀여움이 있었다.


 그녀가 가진 때 묻지 않은 스무 살 여자아이의 맑은 마음가짐이 외부로 묻어나는 듯이 보이기도 했으나, 때때로 그녀의 과한 몸동작에서 어떤 강박증적 양상이 드러났다. 나보코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십 대 소녀에 대한 동경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술수가 선영 안에 존재했다.

 “졸업한 지 3년이나 되셨다니, 그렇겐 안 보이는데요.” 그녀가 어려 보임은 자명하지만 나는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우쭐하는 기색을 내비치면 비아냥거리는 말을 뱉어버리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그런 무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요. 안나는 스무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아. 내 말이 맞죠? 한참 어려 보이는 걸.” 그녀는 본격적으로 나를 동생 취급하기로 결정 내리고,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기기라도 할 기세로 말했다. 소파 손잡이에 걸터앉아 앞으로 기울어진 그녀의 왜소한 상체엔 약간의 살 붙은 팔 두 짝과 커다란 가슴 한 쌍이 적재 허용치 초과하여 아슬아슬하게 달려있다. 지방 없이 메마른 나와는 다르게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모양새이다. 그것은 경박하게 여겨질 만한 풍모도 있지만, 여자로서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대답 없이 긍정의 웃음을 보이고 그녀에게로부터 시선을 옮긴다.


 그의 책상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유사하다. 여러 개의 파일들이 겹쳐 올려져 있고, 유리로 된 연필꽂이에는 같은 브랜드의 검정펜 3개와, 누가 왜 갖다 놓았는지 궁금증이 , 시들어 변색한 백합 한 송이가 꽂혀있다. 나는 떨어진 백합 꽃잎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책상에 걸터앉는다.

 “아! 그 백합 아직도 있네. 티 테이블에 있는 것은 3일 전에 치웠는데……. 하아, 지금 백합이 중요한 건 아니고……. 그래서 모리 오빠는 어디로 간 건가요? 말할 수 없는 사정인가요?”

 벽면에 기대어 창밖을 보고 있는 그녀는 방금 전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아마 자신의 나이를 밝히고 격식을 차릴 이유를 제멋대로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리라. 모리의 사연을 묻는 그녀에게서 시종일관 띠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모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고요. 모리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거라는 가능성은 두지 않고 있었어요. 모리는 갈 곳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더 모르겠어요.”

 선영은 동그랗게 놀란 눈을 하는데, 그 모습은 토끼같이 선량하고 순진해 보인다.

 “그럼 뭐야. 실종이라도 한 건가? 지연 오빠도 모리 오빠의 행방을 모르는데…….” 그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머릿속 복잡함이 얼굴에 그대로 반영되어 이마에 주름이 지고 미간이 사납게 좁혀진다.


 인상을 찌푸린 그녀를 뒤로하고 무심히 고개 돌려 줄곧 신경 쓰였던 모리 책상 옆에 새워진 그림을 본다. 키 큰 남자 세네 명이 느슨히 누워도 가득은 채우지 못할 커다란 그림이다. 응고한 피 같은 검붉은 색이 바탕에 깔려 있고, 실같이 얇은 하얀색 선들이 화면 전체에 규칙적인 간격을 띄우고 중력의 영향을 받는 듯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얇은 블랙펜으로 그려진 새끼손톱 반 크기의 세밀한 모양들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메인 이미지는, 세포가 조직으로 형성되는 과정의 역동성에 주제를 두었나 싶을 정도로 번잡하게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의 무리는 중앙에서 오른편 위쪽으로 자라나 비대칭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 완성작이 아닌지 주변에 도구들이 어질러져 있고 작가의 사인도 없다. 하지만 이미 물감은 딱딱하게 말라있었다. 색감이 어둡고 좌우대칭이 틀어진 작품이어서인지, 불쾌한 기가 느껴지고 속이 메스꺼울 만큼 불편한 감정을 일으킨다. 커다란 캔버스에 똑같은 생김새의 작은 패턴을 반복적으로 채워 넣는 행위는 정신적인 마스터베이션 같았다.


 내가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선영이 다시 말을 시작한다.

 “그거 모리 오빠가 얼마 전에 시작한 거예요. 거의 정리 단계에 있는 건데, 꽤 심혈을 기울였어요. 근데 그 작품 시작하고 부쩍 더 예민하게 굴어서 나 좀 무서웠었어. 모리 오빠, 딱히 대놓고 화를 낸 것도 아닌데, 왠지 소리라도 지를 분위기였으니까.”

 나는 선영이 느꼈던 모리가 변화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헤어진 당일에서야 갈라진 마음으로 그의 변형된 감정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눈치 없는 나한테 화날 만도 해. 그동안 버텨준 모리에게 고마워해야 해.’ 나의 무심함을 질책해 보지만 무딘 나는 염치없게도 또다시 모리가 보고 싶어 졌고, 미안한 마음에 급기야 눈물을 떨어뜨린다. 손바닥으로 받아낸 눈물에 모리의 얼굴이 언뜻 비친 것 같아, 모리가 그리워 슬픈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모리는 어디로 숨었다가 갑자기 내 눈물에서 나타난 걸까.


 “오빠가 그 사람에게 일을 받고 나서 많이 고민했어요. 그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왜 굳이 정식 작가도 아닌 모리 오빠에게 부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오빠는 거절을 못했죠. 나도 곤란해하는 오빠를 옆에서 보면서 이번 일은 맡지 않는 게 좋겠다고 어렴풋이 결론지었었는데, 오빠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더라고요. 그리겠다고 약속을 한 거죠. 그 사람한테.”

 선영이 어떤 뉘앙스를 전할 의도로 ‘그 사람’이라는 단어를 거듭 사용하는 건지 궁금하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숨기는 걸까. 아님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꺼려하는 걸까.


 “그 사람은 누굴 말하는 거죠?”

 선영은 일순간에 비극적인 표정의 탈로 바꿔 쓰고 발음에 강세를 넣어 말한다.

 “모리 오빠의 아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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