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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Sep 09. 2024

선이 흐릿한 여자

평생 잊지 못해

 역 주변으로 상권이 조성된 북적이는 빌딩가의 바깥쪽엔 고즈넉한 주택가가 있었고, 드문드문 문을 연 소상점들을 이정표 삼아 이동했다. 아침나절 내린 비는 무더위를 식혀주기는커녕, 여름의 열기에 습기를 더했다. 대기 중에 넘실대는 불쾌지수 100%를 견디며 한참 동안 골목 사이사이를 헤맸다. 초행자에겐 단순히 순서대로 매겨진 번지수의 역할이 큰 법으로, 복제품처럼 똑같아 보이는 주택들 사이에서 간신히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레이 아틀리에’ 녹슨 동판에 굵고 각진 글씨체를 박은 간판 밑에는, 위의 것과 같은 인상의 검고 묵직해 보이는 철제문이 있었다. 때마침 살짝 열려있는 문틈사이로 손을 넣어 힘겹게 밀고 들어가니 울창하게 가꿔진 정원이 펼쳐졌다. 2층으로 구성된 모리의 일터는 상층의 창문이 유별나게 커다란 점을 제외하곤 주위의 다른 집들과 구분되는 점 없었다.

 대문에서 일직선으로 난 돌길이 불투명 유리 소재의 또 다른 문 앞으로 안내한다. 딱딱한 감촉의 길잡이를 이탈 없이 밟아 나가며, 호화로운 정원을 구경할 새 없이 잰걸음으로 지나친다. 내부와의 연결을 가로막은 탁한 유리문 앞에 서니 시야 안으로 주욱 늘어진 쇠고리 끈이 들어왔다. 그 끈을 당기니 높은 음의 벨이 울리고 벨소리에 화답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십니까?” 아까 이야기를 나눈 여자의 목소리와 같았다.

 “모리의 일 때문에 왔어요.” 내가 대답했다.

 “아, 다행이에요.” 문이 열리며 인사보다 선행된 다행이라는 말은, 내가 모리 여자친구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결정적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부담스러운 기대를 전달해 왔다.


 앳된 얼굴의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다. 처음 와보는 그의 직장은 내 상상 속 장소에서 비행기로 열 시간 거리쯤 동 떨어져 있었다. 내 상상 속에서 모리의 일터는 격조 있는 곳이었다. 그와 어울리는 짙은 브라운 색의 목제 책상과 같은 나무로 만든 폭이 넓고 높은 키의 북 케이스, 그의 서명을 기다리는 서류들, 전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여름의 햇살이 그의 자리를 비추고, 그의 옆자리는 말끔하게 화장을 하고 단정한 투피스를 입은 30대 반의 여성이, 그의 맞은편에는 금테 안경을 쓰고 배가 나온 중년의 남성이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사무실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찾아온 장소에선 유화 물감과 향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곳으로 매일 출근했다간, 특히 컨디션 안 좋은 날에는 호흡곤란이 올 수도 있겠다. 천장과 벽면 곳곳에 기하학적 모양의 펜던트가 불규칙적으로 걸려 있고 조도는 어둡다. 그림을 그리는 곳이 이렇게 어두워도 될까.

 “저……. 모리가 일하는 곳은 어디죠?” 내가 말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요. 가보실래요?”

 “네. 보고 싶어요.”

 “곧 관장님 오신다고 하셨으니 뵙고 가세요. 관장님께서는 모리 오빠의 가족 분들과도 친분이 깊으셔서 무슨 일인지 연락해 보셨는데, 가족 분들마저도 모리 오빠의 행방에 대해 전해 들은 바 없다고 하셨대요. 정말 큰일이죠? 아! 안나씨도 이미 연락해 보셨나요?”

 “아니요. 전 가족 분들을 소개받을 기회가 없었어요.”

 나 또한 모리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사정인지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상세한 자초지종은 이 여자에게 보다 모리의 상사에게 설명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그녀는 따라오라는 말 대신, 나를 흘낏 쳐다보고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앞장서 걸어 들어간다. 나는 엘리스가 토끼를 뒤쫓듯 그녀를 따라 길고 좁은 복도를 총총 걷는다. 뒤에서 본 그녀는 몸집이 작고 선이 흐릿한 여자라는 인상을 준다. 쭉 걸어 들어가니 한가운데에 책상이 위치한 10평 남짓 되는 방이 나온다. 벽은 사방이 암적색으로 페인트칠해졌으며, 조명은 어두운 노란색에 문은 달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독립적인 공간으로 느껴진다. 가구라고는 사무용 데스크와 맞은편의 검은색 가죽 소파가 전부였지만, 허전함보다 그 사무실의 주인에게 포커스가 집중되는 효과를 주었다. 벽에는 아무 그림도 걸려있지 않고, 대신에 크기가 일정한 캔버스를 여러 겹씩 겹쳐 벽에 기대어 놓았다. 마음에 드는 것 한두 개쯤은 걸어 놓아도 될 텐데, 고집스럽게도 모든 벽면을 빈 채로 두었다.

 필요이상으로 친절하게 구는 여자에게서 피로감을 느낀다.

 “관장님은 언제 오시나요?”

 “곧 오실 거예요. 아까 전화드렸을 때, 집에서 출발하신다고 하셨거든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다. 그러다 이내 “저는 선영이에요.”하고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선영을 바라보며 “안나예요.” 하고 그녀의 바통을 이어받아 내 이름을 말한다.

 시종일관 끊길 줄 모르는 그녀의 친절한 미소는 따뜻함보다, 그것에 보답해주여야 한다는 귀찮음을 동반하지만, 특별히 내색하지 않고 나 또한 웃음으로 답한다.


 “쭉 만나고 싶었어요. 모리 오빠의 애인이라면 역시 귀여운 미인이라고 상상했는데, 오늘 보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네요. 딱 그대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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