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출구에서 올라와 지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해가 있을 때와는 다른 풍경으로 변신한 동네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미 어두워진 길은 미로로 변했고, 나는 초행길에 겁먹은 여행자처럼, 수상쩍은 행인들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것도 삼간다. 그렇게 얼마간 헤매고 나니 걷고 다니는 것이 지겨워졌다. 결국 낯 모르는 택시운전사에게 내 숙제를 떠맡겼다. 목적지로 나의 집 주소를 소리 내어 불러준 것만으로도 그를 배신한 기분이 들었다.
오전과 동일한 루트를 따라 같은 곳으로 회귀한 나의 몸은 아침보다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사고회로를 가동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고, 땀은 식어 몸의 온기를 앗아갔다. 지구의 공전에 의해 태양은 내가 있는 곳 가까이 위치했으나, 그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한기 때문에 머릿속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욕실 문 앞에 옷을 훌훌 벗어놓는다. 악덕 고용주 밑에서 고된 일과를 마친 플랜테이션 노동자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초가 된 몸을 욕조 안에 뉘인다. 발이 저릿할 만큼의 뜨거운 물이 수도꼭지에서 쏟아져내렸다. 따뜻한 물이 가슴께까지 차오르자 종일의 긴장이 풀리고 고속열차의 중간 정차역에서 기차를 탄 것 같이 자연스레 잠에 빠져 꿈으로 스르륵 연결된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공간에 홀로 서있다. 그때 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무엇을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비춘다. 연극 무대인가? 나는 천천히 앞으로 움직인다. 무대에 다다르자 조명이 느리게 위로 올라간다. 조명이 멈춘 곳에는 오늘 그가 열어주지 않던 문이 있다. 조명의 범위가 점점 확장되어 나의 앞 쪽 전체를 비추자 몇 개 인지 가늠 할 수 없는 수많은 문들이 있다. 나는 놀라움에 넋을 잃고 조명이 가리키는 문들을 마주한다. 그 모든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그가 얼굴을 내민다. 꿈속의 나는 내가 꿈에 들어와 있음을 알아차리고, 어서 깨어나 현실 속 그의 얼굴을 보게 되길 염원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 예상치 못한 허기가 몰려와 소스라치게 놀랐고, 기운이 없어 간단한 외출준비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에서 나와 터벅터벅 길가로 나왔다. 저기압의 상승기류로 잔뜩 만들어진 구름이 하늘을 빼곡히 덮어 햇빛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어제와 같은 햇볕 내리쬐는 여름 날씨였다면 내려오는 길 중간에서 인내심이 바닥났을 것이다. 이 집에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고부터 자주 가던 동네 베이커리에서 에그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서 그의 집으로 향한다. 일요일 점심에는 모리가 직접 한 요리들로 식탁을 차리고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오늘은 예외가 될 것이다. 몇 번의 일요일을 혼자 보내야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를 못 본 지 일주일을 넘겨 새로운 주의 첫날이 되었다. 갑작스레 그와 헤어지고, 나는 기다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동일한 행동반경 안에서 움직이며 그의 집 앞을 지키는 일과였다. 그동안 그의 집 문 틈으로 사과의 말,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고, 회신의 예감조차 들지 않았다. 오늘은 그의 집에 들러 메모를 남기고 그의 회사로 찾아갈 예정이다. 고층건물의 꼭대기를 압박해 오는 먹빛의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장마가 끝났다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도 비가 다시 시작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곁에 없고 날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7월 29일
모리를 못 본 지 일주일도 넘었어. 너무 보고 싶어.
오늘은 회사로 갈게. -안나-
나는 그의 회사에 간 적이 없다.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모리가 싫었다. 나는 그를 찾기 위한 명분 하나로 무거운 발걸음 옮겨, 낯선 장소를 탐험하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 돋운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흔들리며 맞닥뜨린, 전차 밖 생경한 풍경들은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그는 친숙지 않은 배경을 뒤에 두고 어떠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할까. 그가 냉랭한 표정이라도 짓는다면 나는 그를 둘러싼 공간에도, 쌀쌀맞은 그에게도 적응하지 못하고 같이 점심조차 먹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정오의 지하철은 그리 북적이지도 한산하지도 않다. 그의 명함에 적힌 회사 주소를 바라본다. 그의 영문 직함은 Curator로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의 회사를 찾는 것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주소만 가지곤 이 ‘그레이 아틀리에’라는 곳이 어디쯤인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다. 난 그가 어떤 종류의 회사에 다녔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는 밝은 톤의 목소리로 핸드폰 건너편 누군가에게 쉼 없이 말했으며, 때때로 유치하거나 드물게는 그럴듯한 그림들을 들고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직업에 대한 즐거움, 포부 아니면 불만을 진지하게 혹은 흘리듯이라도 털어놓기 마련이다. 그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의 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우리가 갓 키우기 시작한 블루베리 열매 한 알만큼이었다. 더불어 그가 자신의 일에 애착이 없음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재미 삼아 명함을 받아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에서 빠져나오자 내가 이 동네에 와본 적 없음이 한층 실감 나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명함에 쓰여 있는 회사의 전화번호로 통화를 시도한다.
“네, 그레이 아틀리에입니다.”
사무적인 젊은 여자의 목소리. 그는 이런 무미건조한 여자와 한 공간에서 일해 왔던 걸까.
“모리 씨, 자리에 계십니까?”
전화를 타고 전해지는 딱딱한 분위기에 나 또한 경직된 어투로 대답한다. 조금의 침묵이 흐른다.
“모리 씨는……. 저번 주부터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있는데……. 누구시죠? 모리 씨와 가까운 분이신가요?”
놀라움에 한 키 높아진 여자의 목소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켜본다. 그는 어디에……. 전보다 더 긴 침묵이 흐른다.
“그가 정말로 회사에 있지 않나요? 저는 모리의 여자친구입니다.” 전화기 건너 미상의 인물에게 나를 모리의 여자친구라 말하고 마치 거짓말이라도 한 듯 멈칫한다.
“아……. 모리오빠 애인이시구나. 네. 아까 말씀드렸듯 저번 주부터 오늘까지 연락도 안 되고 출근도 안 하고 있는데, 모리 오빠에게 연락이 안 되시는 거죠? 저희도 큰 곤란을 겪고 있어요. 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가족같이 지내니까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가족같이?’라고 되묻고 싶지만, 입 밖으로 꺼낼만한 수준의 질문은 아니다.
“모리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에요. 모리가 정말 그곳에 없나요?” 대신 다른 물음을 던진다.
“그렇게 물으시니 난처하네요. 네. 정말 없어요. 제가 왜 속이겠어요. 모리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요. 그래서 나쁜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어요. 관장님께서는 여기 어느 누구보다도 다급히 사정을 파악하길 원하세요.”
그를 알고 있는 그 모두가 누구누구인 걸까. 내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혹시 오늘 오후 중으로 찾아봬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