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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Sep 02. 2024

실험실의 쥐

평생 잊지 못해

 그와 함께 하며 나를 잊고 만 것은 리석은 실수였다. 내가 기체의 조종사인줄 알았는데, 실상은 모의비행 시스템이 계산한 대로 움직인 것이었고, 나는 그저 외부에서 의도한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나는 실험쥐처럼 다뤄진 후 상처만 입은 채 버려졌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회성 여자가 아님을 그가 알아야 한다. 절체절명으로 반드시 풀어야 할 어떤 오해가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의 어떤 점이 좋았던 것일까. 그의 울림 있는 목소리, 좀처럼 살이 붙지 않아 뼈와 근육만 남은 몸,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모든 행동에서 느껴지 사려 깊은 마음.

 그는 나의 어떤 점이 좋았던 것일까. 신경질적인 말투, 쉽게 잠들지 못하는 습관, 그의 친구들에게 하는 애교 없는 인사, 그에게 상처 주려는 목적의 메마른 무표정. 그가 이런 나를 받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하는 잠자리가 익숙해질 무렵 어둠에 실려 온 그의 하소연처럼 나의 사랑보다 그의 사랑이 더 컸음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사랑타령에 공연히 각성된 야간의 암흑 속에서와 같이, 아직 나를 많이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온갖 망상들이 두고두고 거듭 상기되는 오래된 흉몽처럼 머릿속에 번져오자, 그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평상시와는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오늘 아침의 그는 금세 잊혔다. 지금 그에게 돌아가서 그와 눈을 마주치고 ‘당신의 뒤틀린 감정들은 모두 나의 탓’이라고 속죄하듯 말해야겠다. 나의 잘못이 아예 없지만은 않을 것이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모든 나쁜 것은 나에게서 흘러나왔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나와 길가에 서있던 택시를 잡아타고 그의 집주소를 말한다. 최대한 빠른 속도를 내어 달라고 요청했으니 30분 후쯤에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은 한여름의 전형적 표본이었다. 반팔과 민소매 차림의 사람들은 무척 더워 보인다. 나는 더위에 무감각하다. 한여름엔 더위에 혹사당해야 정상범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더위에 기진맥진한 경험이 없다.

 오히려 여름의 활기참이 좋았다. 밤까지 잠들지 않는 도시. 어렸을 때의 나는 창가에 앉아 새벽녘까지 꺼지지 않는 상가의 불빛을 구경하고,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름밤을 보냈다. 그때, 후덥지근한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시며 ‘내가 더위를 느끼지 않는 건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이야.’하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그도 나와 같이 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다. 여름이 시작되면 다른 연인들은 별안간 높아진 온도에 적잖이 놀라서 서로 짜증까지 내지만, 우리는 태연하게 붙어 다녔다. 더위를 극복한 사랑을 지닌 듯. 하지만 우리가 지닌 건 높은 온도에 무감각한 체질뿐이었다.


 흥분한 심장의 박동이 왼쪽 가슴을 두드리고, 가슴에서 배로 한 방울의 땀이 똑하고 떨어진다. 땀으로 나의 옷을 적셔서 내가 이토록 처절하게 달려왔음을 그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 바뀔 줄 모르는 빨간불 신호가 나를 더욱 조급하게 한다. 눈치 없는 이 도로를 벗어나 택시에서 내려 달려가면 더 빠를까. 어느 때보다 병적으로 그가 보고 싶은 이 순간이, 나에게 이상 징후로서 감지되어 불안한 마음을 배가시킨다. 갓난아기가 엄마를 부둥켜안듯이 그와 분리되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나이지만, 지금의 불안은 그와 떨어져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 아침 그의 얼굴은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어두운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어떠한 근심거릴 껴안고서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어서 무섭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가엽기도 한 까닭은, 오늘에서야 그가 내보인 그 해석불가능의 마음이 점차로 완성될 때까지 나의 레이더망에는 어떤 수상한 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평온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친구가 싸움을 걸어와도 사람 좋게 웃어넘기며 능수능란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 그가 어째서 간밤에 지구 멸망의 예지몽에 시달린 예언자처럼 불행한 격정을 짊어진 걸까. 그의 불행의 원인제공자가 나라면, 그 악행의 장본인인 나는 미움받아 마땅하지만, 나는 순순히 미움받고 싶지 않다.
 내가 탄 택시가 그의 집골목으로 들어섰고, 나는 택시가 완전히 멈춰 서기도 전에 문을 연다. 그의 집 계단을 오르며 오늘 아침의 장면이 떠올라 겁이 나지만 속도를 줄이진 않는다. 세 번째 층, 맨 왼쪽 집, 익숙한 문고리를 돌린다. 문은 잠겨있고, 그 안쪽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다. 벨을 눌렀으나 역시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고, 양손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 점점 세게 두드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벨을 여러 번 누르지만 문 안쪽은 조금의 미동도 없다. 그에게 전화를 하지만 역시나 받지 않는다. 나의 부름에는 무한히 자애로운 부처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자상하게 ‘응?’ 하던 그가, 지금은 나를 문 밖으로 몰아내고 그 모진 처사에 아무런 거부반응조차 없다.

 

 그의 집 열쇠는, 오늘 아침 해가 내 눈꺼풀 안쪽을 침범해 지난밤부터 이어진 잠의 어둠 속을 헤집어 놓음과 동시에 시작된, 영문 모를 싸움의 흥분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그의 책상 위에 던져 버리고 나왔다. 코에서 폐로 들어가는 공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현기증이 인다. 뇌로 공급되는 산소 부족이 어지러움의 원인이리라 판단하여 숨을 폐 속 깊이까지 보내보려 하지만 가슴언저리에서 다시 되돌아 나온다. 바쁜 와중에 예의상 참석하여 얼굴만 비치는 결혼식에서와 같이, 들이마신 숨은 폐의 입구에서 불법 유턴하여 날숨으로 바뀌더니 다급히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문 앞을 왔다 갔다 서성이다가 그대로 주저앉아서 건물 복도 창을 통해 여름 하늘을 본다. 고기압권에 든 거름망 없는 하늘은 100% 농축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여 꿀 색을 띤다. 이런 날에 그는 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는 더위도 타지 않으면서 왜인지 햇빛은 탐탁지 않아 한다. 그는 어두운 습관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툭하면 악몽을 꾸고, 지나치게 눈물이 없으며, 너무나 침착하다.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무사히 도착할 수는 있어도 이대로 나의 집에 혼자 남게 된다면 제시간에 깨워줄 사람이 없어 침대에 누운 채로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는 가끔 나의 귀 가까이에 입을 대고 ‘너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곧잘 말하곤 했지만 일찍이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

 그는 과장된 연출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시나리오 속 주인공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가 되레 나를 이상하다 표현한 것을 괘심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의 기분이 최대한 빨리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그가 이 문을 열고 ‘고생 많았어. 이제 가라앉았어.’라고 해주면 만족한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나는 지지치 않는 여름 해의 난폭함을 견뎌내며 낮 시간 동안 이 친숙한 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버젓이 문 안쪽을 차지하고 앉아서 나의 고생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지 않을까. 나를 골탕 먹이고 그 즐거움을 안주 삼아 냉장고 안에 줄 세워 둔 캔맥주를 꼴깍꼴깍 비우고 있진 않을까.


 지평선 부분의 레몬 색과 서서히 세력을 넓혀가는 레드자몽 색이 서쪽하늘에 2대 1 비율로 깔려있다. 석양이 자신과 함께 내 몸도 땅 밑으로 끌고 들어가 불가항력의 나른함이 사정없이 덮쳐온다. 해가 지면 건전한 활력이 넘치던 하루는 마무리되고, 위태로운 유혹 있는 어스름이 밀려들기 마련이다.

 ‘오늘은 소용없어.’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담담한 그의 음성에 집으로 돌아가길 결정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분히 걸으려 노력한다. 토요일 저녁의 페달은 거리에 어둠이 드리우는 속도에 제곱으로 비례하여 가속된다. 떠들썩한 한여름의 화려함에 이질감을 느끼고 ‘다시 겨울이 왔으면, 그를 만난 겨울이 다시 왔으면.’ 하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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