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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Aug 30. 2024

이별은 나에게로부터

평생 잊지 못해

  그와 싸우고 그의 집에서 나왔다. 옷가지며, 있으나 없으나 한 잡다한 것들이며, 내 소유의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겼지만  작은 숄더백 하나와 기내용 트렁크가방 하나를 채운 정도의 짐이 전부다. 내가 물욕에 민감하지 않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오른손에 매달린 채 끌려오는 회색 캐리어에 눈길을 준다. 아니다. 그에게 난 저만큼이다. 나의 물욕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에게서 난 딱 저만큼의 공간을 차지하는 무게감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와 나는 대단치 않은 관계였다.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느닷없을 줄은,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나듯이 그 집을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헤어짐은 햇볕 쨍한 무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일어났다. 나는 비가 오거나, 적어도 구름 잔뜩 낀 날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인연의 끈으로도 묶여있지 않다.

 나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탄다. 열 시를 겨우 넘긴 토요일,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외출한 사람들은 휴일의 혼잡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평일 출근 시간대의 신경질적 번잡함과는 대비되는 자발적 혼란이었다. 가족 혹은 연인 단위의 사람들이 갓 뜬 해의 성화에 부응하여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하고, 미리 구상해 놨을 나들이 플랜을 이행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그는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자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피곤을 덜어내고 침대에서 나왔다. 집에 들어앉아 몸 쓸 일 없던 나는 그가 일어날 때까지 지루해하며 뒤척이지도 않고, 죽은 듯이 자는 그의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살기 시작하고 몇 주간 동안의 금요일 밤엔 머리를 맞대고, 주말 계획을 화기애애하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둘 다 나란히 늦잠을 자고 어리둥절해하며 일어나곤 했다. 그와의 휴일이 계획대로 진행된 적은 6개월 동안 단 한 번뿐이었다.
 오늘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창밖을 보며 앉아있는 그의 뒤통수에서 특별함을 느끼고 기뻐했으나, 막 잠에서 깬 나를 돌아본 그의 표정에 나는 의아할 뿐이었다. 그때 그는 슬픔이나 증오, 혹은 슬플 만큼의 증오 따위의 어두운 감정을 품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낯선 그에게서 거리를 둔 채로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고 서있으니, 그의 머릿속인지 마음속인지 어딘지 모를 어딘가에서부터 나를 거부하는 무언가의 작용이 내비쳤다.

 창밖을 스치는 풍경이 낯설다. 그와 함께 지낸 6개월의 시간을 이다지도 길게 느끼는 것은 나의 인지적 오류이리라. 오늘 아침의 그는 차분한 말투로 나를 다그치고 집밖으로 내몰았다. 그가 나에게 전해줬던 그동안의 온기 있는 여러 감정들이 악독한 냉정으로 변신하여 나를 타기해버림은 정황상 납득할 수 없다. 그 내면의 차가움은 지금껏 숨겼다 하기엔 사이즈가 거대하여, 바로 조금 전 나의 자는 얼굴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는 판단이 가장 유력한 가설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는 미치광이 타인 같았다.
 증오심이 잔뜻 배여 한층 투명해진 그의 연갈색 눈동자에 울분이 차오른 나는 '당장 여기서 나가버릴 거야.' 하고 소리 지르려고 하였다. 숨을 들이쉰 순간, 그는 나의 입을 막듯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 내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내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민 그가 또박또박 발음하여 내뱉은 " 이 이상 당신을 잡고 늘어지는 건,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 하는 위협적인 한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무의식과 같이 어떤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님 무의미한 화풀이 같은 말일까.

 집에 돌아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올라온 언덕 중턱에 위치한 나의 집은 반년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나의 냄새가 났다. 이 집에서 예전만큼 활기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일을 겪고 나서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내 억지 다짐에 불과할 뿐이고, 6개월 전과 다름없는 이 집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다. 언덕길이 내려다보이는 창문, 침대 머리맡 벽에 걸린 그림 속 에곤 쉴레를 맹랑하게 올려다보는 주근깨 난 빨간 머리 소녀, 6개월 전과 일말의 차이도 없이 흘러가는 지금의 시간.
 나는 현관에 멈춰 서서, 구두도 벗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갈 결심이 서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째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멈춰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가 그와 있는 동안 이 공간은 여기에 그대로 있었다. 무생물이 자력으로 성장할 수 없음은 그 소유자의 애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는 인형과 같이, 나와 관계한 모든 것에 생명이 깃들 정도로 사무치게 사랑을 주고 싶었다. 계절은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었지만, 나에게는 달라진 철만큼은커녕 창턱 위에서 티 안 나게 홀로 자라난 선인장만큼의 변화도 없다. 그에게서부터 갈라져 나오자, 나의 지난 반년은 소속 없는 한낱 철부지의 무효한 나날이 되었다. 내가 그의 곁에서 아무 주체성도 갖지 않았으며, 오로지 그 사람에게 온 자신을 의탁하여 내가 아닌 그로서 살았음을 알아차렸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더 이상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조금의 힘도 낼 수 없지만 짐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검정 에나멜 하이힐, 검정 스니커즈. 그는 이 두 켤레의 신발을 선물하며, '너는 검은색이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휘둘리는 것도 싫었지만 그와 한시도 떨어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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