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o much thinking will kill U
평생 잊지 못해
모리의 아버지라면 한번 들은 적 있다. 어느 일요일의 오후에 가족과 저녁식사가 있던 그는, 나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훌륭히 외출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가봐야 해. 아버지 전시회 첫날이라서. 나도 내키지 않지만 갈 수밖에 없어. 밥 먹고 먼저 자고 있으면 돌아올게.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아. 미안.”
그는 자신의 몸에서 나를 떼어내 의자에 앉히고 전자레인지에 데운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의 칭얼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손으로 수저를 들어 내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그는 언제나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감시했지만, 그것의 목적은 사사건건 간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갓 걸음마를 뗀 아이를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는 엄마처럼,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 상냥하게 보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날 밤, 모리는 그의 말대로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공연히 텔레비전을 틀어 코미디 프로그램에 채널을 맞춰놓았다. 시답지 않은 유머에도 동료애를 발휘해 과장되게 웃어주는 쇼프로의 다정한 출연자들에게 동조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금방 시들해졌다.
뭐든지 기다리면 순순히 오는 법이 결코 없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나를 집에 혼자 두고 저녁모임에 간 부모님도, 이불속에서 밤을 지새울 각오로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 세웠던 크리스마스이브 한밤중의 부스럭거림도. 모두들 내가 깊이 잠들 때까지 문 밖에 서서 나의 동태를 살폈음이 틀림없다.
그가 예견한 것과 같이,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니 그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막 출근하려고 현관문 앞에 선 그의 등 뒤에서 샐쭉하게 물었다.
“도대체 모리 아버지가 나보다 얼마만큼 더 중요한 건데?”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 하다가 걸음을 멈춰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눈에 힘을 주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위협적인 의도인가 싶었지만 그의 눈빛에서 언뜻 장난기가 내비쳤다. 그의 사랑스러운 동그란 눈을 바라보며 나는 ‘빨리 대답해 줘.’라는 태도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아버지는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너는 도대체 뭘 그렇게 신경 쓰는 거야. 항상."
“중요하지 않은 게 오히려 나 같아서 신경이 쓰이는 거야. 항상.”
“너는 이런저런 생각이 너무 많아.”
모리는 고민하기를 좋아해서, 말버릇처럼 ‘생각할 시간 좀 줘.’ 하며 여유 부리는 것도 즐겼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Too much thinking will kill you’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은 내가 아니라 모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 전시회는 어땠어?”
한순간 그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한 나쁜 독이 묻은 화살은 누구의 쪽에서 날아들었는지, 나로부터 인지 아님 그의 아버지로부터 인지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하였다.
“아버지 작품들은 하나 같이 규모가 대단해서 보는 사람들을 위축시켜. 아버지의 목적은 예술의 창출이 아닐지도 몰라. 안나는 아버지를 보지 않는 게 좋아. 사실 이해 할 수 없을 거야. 그런 종류의 사람을…….”
그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은 역까지 배웅해 줄래?” 그와 나는 손도 잡지 않고 서로 팔짱도 끼지 않은 채로, 나란히 걸어 역에 도착했다. 그는 역 안으로 내려가기 전 왜인지 멈칫했지만 뒤돌아 나를 바라보진 않았다.
나와 그의 대화에서 그의 아버지가 주제가 된 적은 그날이 유일했고 오랜 시간도 아니었다.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이름 알려진 화가이고,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으며, 막내인 모리 위로는 형과 누나가 각각 한 명씩 있다.
이 소량의 데이터도 그의 입을 통해 얻어낸 것이 아니고, 집에서 혼자 뒹굴 거릴 때 머리도 같이 굴려 추측해 낸 가정에 불과했다. 그가 나에게 이런 기본적인 가족관계도 말해주지 않은 까닭은, 언제나 그랬듯 어떤 의도를 담은 것일지 모른다.
“여기에 있었네? 말소리가 들려서 따라 들어왔어.”
포장하지도 않고 그저 한 묶음으로 감아만 놓은 풍성한 안개꽃다발을 한 손에 든 여인이 복도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서서 나와 선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4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는 내 쪽으로 박력 있게 걸어와 모리의 책상에 꽃다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는 듯, 살며시 꽃다발에서 손을 떼고 얼마간 그 빈자리에 시선을 둔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다른 기척을 감지한 사냥개처럼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데, 나의 전체가 아닌 내 얼굴의 눈, 코, 입, 얼굴선,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눈동자만 움직여 뜯어본다.
“모리의 애인을 드디어 만나네요. 모리는 어렸을 때부터 봐왔는데……. 이번에는 소문만 무성하고, 모리가 어지간히 애지중지해야 말이에요.” 그녀는 진기한 유물을 관찰하는 고고학자처럼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정말이에요. 모리 오빠가 안나씨 전 분들은 우리한테 소개해주고 두루두루 친해지기를 강요까지 했던 거 알아요? 갑자기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서 모두 수상하게 여길 만큼이었다니까요. 우리들이 ‘혹시 이번엔 남자 아니야?’ 하고 놀릴 정도였어요. 그나저나 꽃향기가 강하네요.” 선영이 창문을 열며 ‘호호호’ 하고 웃는다.
어디선가, 싱그러운 꽃향기가 아닌 비릿한 풀냄새가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