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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아 Sep 27. 2024

L'Amant

평생 잊지 못해

 스무 살이 되는 해, 20년 동안 살았던 집을 나왔다.


 그 계기는 성인이 되면 딸아이를 자신에게 맡겨달라던, 내가 어릴 때부터 아빠와 알고 지내던 지인의 요구에 응함에 있었다. 그는 나의 장래를 거창하게 약속하며 당장 결혼이라도 할 것처럼 부모님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는 내가 요구하지도 않은 물질적 후원에 힘썼고 나는 그것에서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지만, 거부할 만큼의 동기 생성은 되지 않아 그런 부정적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노력했었다.


 그와의 생활은 1년 만에 끝이 났다. 그에겐 새로운 여자가 생긴 듯했고, 내가 모리에게 간다고 했을 때에 그는 말리지 않았다. 그 남자와 1년 동안 살면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조바심을 알게 됐고, 그 초조함에서 비롯한 젊음에 대한 집착은 남자를 더욱 쇠진시켰다. 젊은 여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장유유서의 서열이 무너지는 참극은 동물적이다. 은혜는 이와 비슷한 어떤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여주인공도 연기해 본 적 없을 것이다.     




 저녁거리 마련을 위해 마켓으로 향한다. 혼자 장보기가 처음은 아니지만, 나만을 위한 장보기는 처음이다. 최초의 경험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괜스레 긴장이 된다.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필요한 것들을 머릿속에 상기시킨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무엇을 해 먹을까? 모리는 휴일마다 요리를 했다. 휴일이 아니면 가스레인지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그 희소한 빈도가 요리할 때의 열기로 데워지는 공기를 유난히 따뜻하게 만들었고, 점화할 때 새어 나오는 비릿한 가스 냄새는 쉬는 날의 나른함과 어우러져 기분 좋았다.


 평일에 모리는 냉장고 안에 도시락을 하나씩 준비해 놓았다. 퇴근하면서 집골목 어귀에 위치한 반찬가게에 들러 사 오는 제품이었다. 그는 저녁마다, ‘엄마의 마음’으로 조미료를 쓰지 않고 친환경 재료만을 사용한다는 광고판을 내건 가게에 들어가 도시락을 골랐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다음 날을 위한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으며 내가 그날 분의 음식을 먹었는지 검사하곤 했는데, 끼니 때우길 깜빡하고 잠에라도 든 날은 극성스러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모리의 보살핌이 없어진 후, 간신히 먹었던 평일의 점심식사도 자주 거르게 되었다. 오늘은 ‘무엇’의 영향으로 나 스스로 밥을 해 먹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이제는 의젓하게 행동하는 성인 여자로서 혼자서도 아무런 무리 없이 살아가야 한다.


 두부와 계란을 사고, 소금과 후추 같은 조미료들을 고른다. 이참에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전부 구입할 요량으로 이것저것 카트에 담았으나, 뒤늦게 다 들고 갈 수 없음을 알아채고 급하지 않은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오늘은 저녁에 요리해먹을 음식 재료들과 어제 필요의 긴박함을 깨달은 세탁기 세제만을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스카이블루의 플라스틱 통에 라벤더가 그려져 구매 욕구를 충동질하는 대용량의 섬유유연제 때문에, 짐을 든 손에 새겨진 바구니 끈 자국이 한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집안으로 들어와서 손을 씻자마자 두부를 넣은 된장국과 양파와 당근, 파를 썰어 넣은 계란 부침을 만들었다. 양질의 영양분 섭취에 뿌듯함을 느끼며, 손수 만든 반찬을 입에 넣고 꼭꼭 씹는다. 고개를 들자 창밖 하늘에서부터 흘러든 화려한 석양빛이 내 방에 엎질러져 있음이 보인다. 지는 해는 이미 힘을 잃어 오랫동안 응시해도 눈이 아프지 않고 영원히 보고 있어도 좋을 만큼 아름답다. 태양의 꼬리만이 남았고, 모리 없이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한 여름의 긴 낮이 지나가 땅의 열기가 식으면 사람들은 안도하며 잠이 든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간신히 보이는 해의 마지막 몸체에서 모리의 얼굴이 보인다. 이렇게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의 마음도 전해져 왔다. 그가 여전히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고, 어딘가에 앉아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저 해를 바라보며, 동시에 내 얼굴을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탁기를 돌린다. 저녁을 천천히 먹고, 천천히 뒷정리를 했다. 때마침 밀린 세탁물이 생각났고, 오늘 사온 세제를 있는 힘껏 개봉했다. 세탁물을 한가득 넣고, 세제를 조심스레 넣는다. 자기 전에 젖은 옷들을 널고, 또 그전에 엄마한테 전화를 할 예정이다. 나는 이제 엄마의 딸이 혼자 살게 되었음을 보고하고 내일은 나와 기꺼이 시간을 보내지 않겠냐고 물어볼 것이다.


 어젯밤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편치 않은 잠을 잤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착각에 숨 막히는 불안감을 느끼며, 어릴 적부터 있어온 원인 모를 심한 기침을 쉴 새 없이 토해 내었다. 먼동 트는 빛에 안심하고 나서야 한두 시간 더 잤다. 이른 아침부터 여름엔 보기 힘들고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노란 귤이 먹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어제 잠자리 들기 전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통화 대기음의 반복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웠다. 기계음에 익숙해지지 못한 나는 초조해하며 엄마의 응답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장난기 묻어나는 엄마의 말투에 긴장으로 경직된 어깨의 힘이 풀리고 한결 편안한 마음이 된다.


 “엄마.” 나도 애교 어린 딸의 목소리를 연출하여 호응했다. 내가 아기의 역할을 하는 관계는 엄마와 나 사이에서 뿐이다. 아빠에게도, 친구에게도, 모리에게도, 그 어느 나이 많은 사람에게도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이지만 엄마에게는 한 번도 그러한 마음이 든 적이 없다.


 “응. 어디니?” 엄마는 평소의 말투로 돌아가 말을 이어나갔다. 보통 때 엄마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나긋해서 차가운 인상을 준다. 오직 나와 이야기할 때만 애교 있는 엄마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엄마의 그런 행동은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어떤 마법 같았다.


 “나 집이야. 모리 집이 아니라 내 집.”

 “왜? 모리는 어쩌고?” 엄마는 의아해하며 궁금증이 가득 찼다. 눈이 동그래져서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우는 엄마의 모습이 마주 앉아 대화하는 듯 눈에 선했다.


 “쫓겨났어. 나쁜 일은 없었는데 그냥 쫓겨났어. 그 이유는 나도 잘 몰라. 그냥 그렇게 됐어. 모리랑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 모리와의 자초지종을 전화로 이야기하기는 싫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의 말들이 기나긴 전화선을 타고 그 진정성을 유실당할까봐, 모두 털어놔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이렇게 엄마와 통화가 끝난 후 들뜬 불안감에 잠들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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