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제 꽃가게에서 장미꽃들을 보는데 그게 사람으로 치면 팔이나 다리잖아. 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징그러워서 꽂아놓은 꽃들이 다 사람 팔로 보이더라고.”
성민은 한동안 말없이 공책에 그림을 그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갑자기 말을 꺼냈다.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색을 내비치며 담뱃불을 붙인다.
“하지만 그건 사람 팔이 아니잖아요.” 나도 모르게 반박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가 애써 자신의 사유전개가 남다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언짢았고, 그 표현의 유치함이 거북했다.
“안나씨, 비죽비죽 튀어나온 장미들이 사람 손처럼 느껴졌다는 거야.” 선영은 내가 이해를 못 한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천천히 설명한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볍게 응시한다. 그 말엔 아무래도 공감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장미 이야기가 정리되자 나는 식탁에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쳐다본다. 처음 보는 남자가 담배를 물고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고 있다. 자연스럽게 기른 검은색 생머리가 조명 빛을 반사하여 윤기를 내고, 얼굴에도 반짝거리는 미소를 걸친 채로 걸어온다.
사람들은 그에게 반응하여 “어이, 늦었네.”, “어서 와” 등의 말을 건넨다.
그는 물이 흐르는 대로 수영하는 물고기처럼 미끄러지듯 내 옆의 빈자리로 들어와 앉는다. 나는 낯선 이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본다. 그도 나의 존재를 알아차려 움찔하고 몸을 뒤로 뺀다. 그의 벙찐 표정에 나는 긴장이 풀려 ‘풋’ 하고 웃고 말았지만 그는 여전히 굳어진 채 나를 보고 있다.
“안나씨?” 그는 내가 아닌 주위 사람들에게 묻는다. 영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나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다. 깊이 고개 숙인 예의 바른 그의 머리통이 눈에 들어온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왠지 수줍어 보인다.
내 옆에서 선영이 큰 소리 내어 소개한다. “저 사람은 지연이예요. 모리 오빠에게 얘기 많이 들었죠?”
모리에게서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말해본다.
“지연……. 지연…….”
“난 너 처음 봤을 때 진짜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지연이랑 하원이랑 다 같이, 너 진짜 예쁘다고 칭찬 많이 했어. 근데 가끔 일 년에 한두 번 그날 있잖아. 다 검은색으로 입고 입술 빨갛게 칠하는 날. 그거 진짜 못생겼어. 내가 본 얼굴 중에 그게 최고 못생겼어. 진짜 펭귄 같아.”
성민의 솔직한 농담에 선영은 취기 오른 붉은 얼굴로 왈가닥처럼 웃어댔다. 저녁을 마치고 모두 작업실로 자리를 이동하여 각자 취향에 맞는 술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낮은 조도의 스탠드 조명 아래에 놓인 소파에 앉아 대화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오랜만의 소란스러움에 며칠간 쌓여오던 불안감이 조금 누그러진다. 아틀리에 사람들에게도 점차 익숙해지고 슬슬 포근한 나른함이 찾아온다. 나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싸구려 팩 와인을 홀짝 거리며 계속해서 눈을 껌벅인다.
“안이 좀 덥죠? 지금 얼굴이 빨개요.” 내 건너편에 살며시 와 앉은 지연도 얼굴이 상기되어 보인다.
“안이 덥다기보다 와인 두 잔 째라 몸이 열을 좀 내기고 하고, 빨개지기도 하는가 봐요.” 나는 낮은 온도에 맞춰진 에어컨을 힐끔 본다.
그는 나를 따라서 에어컨을 바라보며 “아! 그러네요.” 하고 멋쩍어한다.
“아까는 늦게 와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예전부터 안나씨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었어요. 모리가 제 얘기하던가요?”
그는 말투와 몸짓에서 묘하게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이다. 다리를 꼬고 앉은 모양새와 차분한 말투, 젤라틴으로 된 얇은 막에 싸인 듯 유달리 매끄럽게 반짝이는 눈에서 순수한 여성미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남자들이 연출해 내는 부자연스러운 여성미가 아닌, 여자들이 만드는 고유의 느낌이다.
“모리는 원래 나한테 아무 얘기도 안 해요. 모리가 밖에서 뭘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나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요.” 나는 부재중인 모리를 비아냥거린 듯해서 내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나의 앞에 자리한 남자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나는 모리한테 안나씨 얘기 많이 들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늘인다. 그러곤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 극적인 행동이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아님 대화의 흐름을 고려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모른다.
“언젠가 보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리 없이 대면하는 상황은 예상 밖이라 대처가 안 되네요. 사실 기대 이상의 첫 만남이라 좀 떨리기도 하고.”
“아, 지금 생각났는데 한번 들은 적이 있어요.”
“안나한테 한 번도 말 안 한 베프가 있어.” 바람 한 자락 불지 않는 조용한 초여름의 어느 밤, 테라스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모리가 침대 위의 나를 향해 말했다. 한 손에는 물인지 보드카인지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체가 든 유리잔을 떨어뜨릴 듯 대충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난간에 얹어 자연스레 무게중심을 싣고 있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붙어 다니는 친구가 있는데, 그에게 지겹다는 말 셀 수 없이 많이 했고 대학 때는 서로 한심하다 생각했지만, 그 시점이 지나자 결혼 한지 50년 된 노부부처럼 되어 버렸다고 했다.
“마음에 안 드는 거 투성이인데, 변태처럼 만날 붙어있게 된다니까.” 그는 눈꺼풀에 힘이 풀려 눈을 반만 뜨고 테라스 문을 열어 놓은 채 침대로 들어왔다.
“문은 닫고 와야지. 남자 애인도 있는 주제에.” 나는 깔깔거리며 술 냄새나는 모리의 머리통을 두 팔로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