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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너앤라이터 Sep 10. 2024

하나, 지잡대 청년이 서울로 향하다.

# 4. 두 번째 탈출 기회


# 4. 두 번째 탈출 기회



나의 구세주는 자신의 책상 옆에 나를 앉혔다. "반갑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지낼 곳은 정했고?" '네. 이모댁에서 잠시 있기로 했습니다.' "다행이네. 교수님께 얘기는 들었지? 너 포함 4명이 경쟁을 통해 2명이 정직원이 될 거야. 직무 역량, 근무 태도, 최종 테스트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채용을 결정할 거니까 잘해야 돼." '네? 저는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승산이 없는 것은 빨리 포기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나를 제외한 3명은 수도권 출신이고 학벌도, 환경도 좋았다. 선배는 얘기를 끝내고 나를 부서 임직원에게 인사를 시켰다. 부서장을 비롯해 임원들에게 개별 인사를 하고 사무실 가운데 서서 직원들에게 전체 인사를 했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니 긴장됐다. 인턴이라는 얘기를 들은 후라 자신감까지 떨어졌다. 신입사원으로서 인사말을 준비했는데 인사말을 즉흥적으로 바꿔야 했다. '오늘부터 인턴으로 일하게 된 000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틀에 박힌 인사를 했다. 사람들의 무심한 반응과 무표정,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내 처지를 생각하니 뛰쳐나가고 싶었다. 두 번째 탈출 기회였다. 직장인의 삶을 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나는 그 기회를 또 놓쳤다. 사원쯤 돼 보이는 남자에게 이끌려갔다. 창고 같은 곳으로 데려가더니 테이블 앞에 앉혔다. "아직 자리가 없어서 임시로 여기에 있어야 됩니다. 내일 다른 학교 출신 3명이 합류할 거고 그때 자리 배정이 될 겁니다. 내일부터는 정장 말고 편하게 입고 오세요." 그렇게 얘기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래된 종이 냄새, 잉크와 접착제 냄새가 가득한 창고에 홀로 남게 되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직급이 낮은 직원들만 간간이 들어와 테이블 위에서 작업을 하고 나갔다. 누가 들어올 때마다 엉덩이가 움찔움찔, 고개는 꾸벅꾸벅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타향살이는 눈치살이인가 보다. 이모집에서 아침밥을 먹으면서 눈치 보고 회사에선 사람들이 오가기만 해도 눈치를 본다. 점심시간이 됐는지 직원들이 삼삼오오 몰려 나간다. 그 순간 나는 밥을 어떻게 해결하지? 아니야 밥을 먹으면 체할 거 같아.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의 구세주 선배가 왔다. "같이 식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출장이 생겼어. 팀 배정도 되지 않았고 할 일도 없으니 오늘은 집에 돌아가고 내일 보자." 설움이 북받쳤다. 이곳에서 나의 존재감은 1도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집에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두고 봐라 정직원이 되고 말 거다. 설움은 독기를 품게 했고, 직장인으로 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정오가 지난 시간 이모집으로 갈 수 없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들키기 싫었다. 부모님 귀에 들어갈 게 뻔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설명할 만큼 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고양시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휴가 때 구파발과 연신내, 그리고 서울역 정도는 다녔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서울은 난생처음이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몰랐다. 회사 인근의 5호선 둔촌동역에서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탔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객실문 위에 있는 노선도를 쳐다봤다. 가장 많이 들어본 종로와 광화문이 눈에 들어왔다. 종로를 가기로 했다. 뭐가 있는지, 무엇을 할지 정하지 않은 채 가장 익숙한 지명으로 향했다. 종로3가역이라는 방송을 듣고 내렸다. 이정표도 보지 않고 발길 닿는 곳으로 이동했다. 어떤 경로로 갔는지 기억이 없지만 복잡한 골목길도 나왔다가 높은 업무 빌딩이 있는 거리를 걷기도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거의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런 보호막 없이 각박한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 앞으로 있을 일들,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는 두려움이 머리를 괴롭혔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한꺼번에 주어졌다. 이대로 서울에 머물러야 하는가? 삶은 원래 이런 것인가? 고뇌를 하는 가운데 본능적으로 배는 고팠다. 점심시간이 이미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다. 허름한 백반집이었던 거 같은데 어르신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막걸리가 놓여 있고 술을 드시고 계셨다. 다행히 내가 앉을 만한 자리가 있었다. 백반과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아침에 눈칫밥을 먹어서 그런지 모든 반찬이 맛있었다. 공깃밥을 추가하면서 막걸리도 한 병 추가했다. 막걸리 두 병을 먹으면 취하는 주량인데 정신이 멀쩡했다. 3병을 마신 후부터 기억이 없다. 겨우 계산을 했던 흐릿한 기억을 갖고 거리로 나왔다. 조금 걷다 보니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청계천이다. 하천 주변으로 흐릿하게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앉을 곳을 찾아 내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가 울렸다. 이모였다. 일어나 보니 딱딱한 벤치에 누워 있었다. 술 취한 상태라 전화를 받진 않았다. 시간은 자정이 넘었고 주변은 조용했다. 정신을 차리고 이모에게 전화했다. '전화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친한 친구를 만나서 한 잔 했는데 친구집에 자고 가겠습니다.' 라며 거짓말을 했다. 술 취한 채 들어가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인근 모텔에서 자기로 했다. 씻으려고 옷을 벗는데 생각이 났다. 양복 말고 편하게 입고 오라고 했는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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