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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너앤라이터 Sep 24. 2024

# 5. 세 번째 탈출 기회

하나, 지잡대 청년이 서울로 향하다.


# 5. 세 번째 탈출 기회


나는 어쩔 수 없이 선배의 조언을 무시하고 정장을 입고 출근했다. 종로에서 회사까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 새벽같이 나왔다. 회사에 도착하니 8시였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만 보이고 출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정직원도 아니고 할 일도 없는데 일찍 출근한 나를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됐다. 능력이 없어서 이 회사에 목숨 건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까? 또는 인턴이 되게 성실하구나! 부정과 긍정이 교차하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을지 나가서 시간을 때우다 출근이 붐비는 시간에 다시 올지 망설였다. 


이때만 해도 남의 시선에 삶이 흔들리는 그런 시절이었다. 자아는 없었고 남들에게 비치는 모습이 중요했다. 그런 나에게 제대로 된 자리도 없이 작업실 의자에 앉아 출근하는 직원들의 시선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밖으로 나갔다. 출근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지하철 역과는 반대로 걸었다.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 대학 4년 총 16년의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 아니야 그런 배부른 생각은 집어치워. 주위를 봐. 다들 바쁘게 어디론가 출근하고 있잖아. 다 그렇게 사는 거야. 헛튼 생각 말고 정직원으로 뽑히는데 집중하면 돼'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걸어오던 누군가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회사는 반대쪽인데 어디 가세요? 어? 또 정장 입고 오셨네요?" 어제 나를 안내해 주던 선배였다. 나는 어버버 하며 말을 못 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선배와 헤어진 후 회사 반대로 계속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 반대로 쭉 갔어야 했다. 10분쯤 걸었을까 시계를 보고 회사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세 번째 들어오는 사무실이지만 여전히 낯설다. 누가 누군지 전혀 모른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잽싸게 작업실로 들어갔다. 들어갔더니 낯선 이가 한 명 앉아 있다. 올 것이 왔다. 3달간 승부를 겨를 경쟁자 중 한 명이다.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친구는 나와는 다르게 첫 출근부터 평상복으로 출근했다. 친절한 선배를 둔 친구였다. 나의 구세주 선배님은 바쁘셔서 알려주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걸로 서운해하면 안 된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준 은인이니까. 9시가 다 되어갈 때쯤 나머지 경쟁자 두 명까지 방 안을 채웠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 줄 선배가 들어왔다. 4개 팀에 한 명씩 배정되고 3달 동안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마지막 주에 과제를 통해 최종 2명을 선출한다는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끝내고 우리는 각 팀으로 흩어졌다. 내가 간 팀은 차장-과장-대리로 구성된 팀에 대학생 알바 1명이 있었다. 작은 테이블에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팀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들을 소개해 줬다. 앞으로 잘해보자는 말을 끝으로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사수인 대리님은 얼어 있는 나를 풀어주기 위해 담배를 피우냐고 물었다. 그 당시 나는 술과 담배와 아주 친했기에 사수를 따라 옥상 정원 한편에 흡연 장소로 이동했다. 군대에서 선임에게 끌려가 담배 피우는 기분이었다. 사수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사수의 학교 후배를 같은 팀으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 후배는 이 회사에서 알바 경험도 있고 후배라 편하게 일 시킬 수 있는데 나는 알바 경험도 전혀 없고 처음부터 가르쳐야 하니 불편하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그게 내 잘못처럼 얘기하니 주눅이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자존감도 낮았고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았기에 사수의 말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는 이 팀에 서 원치 않은 사람이었다. 자리에 돌아오면서 그 불편함은 계속 됐다. 컴퓨터를 켜고 이것저것 세팅을 하고 있었다. 사수가 나를 부른다. 옆자리로 잽싸게 달려갔다. "잘하는 프로그램이 뭐야?" '잘하는 거 말입니까? 잘하는 건 없습니다. 한글은 리포트 쓰는 정도고...' 원치 않는 불청객이라는 생각에 주눅이 든 상태라 자신감이 더 떨어졌다. 사수는 한숨을 쉬더니, "아니 4학년 때 뭐 한 거야? 취업할 준비를 하나도 안 하고. 회사는 가르쳐 주는 데가 아니야. 나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니니 독학을 하든, 학원을 다니든 우리가 쓰는 프로그램은 알아서 배워. 직무 평가 점수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겠지. 너를 제외한 3명은 방학 중에 알바 경험이 다 있는데 너만 없더라고." 지방에서 학교를 다닌 나는 알바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 


사수의 말을 들은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수는 바쁘게 만들 자료가 있는데 그중 한 부분을 떼어 주면서 점심 전까지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익숙지 않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야 하는 자료였다. 프로그램을 켰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30분은 머리가 하얀 채로 멍하니 있었다. 용기를 내어 옆에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어봤다. 아르바이트생은 2학년이었는데 모든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쓰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의 설명을 들을 때까지 이해했으나 직접 시도하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사수가 시킨 일을 하느라 알바도 정신없이 바빴다. 더 물어보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혼자서 끙끙 거리며 시간만 흘렀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수는 왜  아무런 얘기가 없냐고 언짢은 말투를 보낸다. '아직 30%도 못했습니다.' "뭐라고? 아 열받네! 중간에 이렇다 말도 없이 시간 다 돼서 못했다고? 이거 너 안 시키고 알바시켰으면 30분이면 하는 일이야.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 정신 차려.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시간을 줄 테니 마무리해"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프로그램을 쓸 줄 모르기에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다들 식사를 하러 나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따돌림의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회사에 쓸모없는 잉여인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자 내 몸은 점점 굳어졌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가며 발버둥 쳤지만 작업을 완료하지 못했다. 결국 사수의 한 마디에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너를 직원으로 뽑을 바엔 저기 있는 2학년 알바생을 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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