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샘이 하나 존재한다.
아파트 안에 샘이라니, 퍽이나 뚱딴지같은 소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여지없이 샘이다.
그 샘은 화장실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들은 자주 그 샘을 찾는다. 하지만 샘에서 물을 먹는대신, 그 위에 앉았다 일어난다. 일어날때면 여지없이 큰 굉음과 함께 물이 흘러내리고, 곧 새 물로 채워진다.
우리 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 중 하나는 바로 화장실이다.
시원한 물과 넉넉한 화장지가 있어 언제나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다.
인간들이 샤워할 때 나도 가끔 옆에서 세수를 하거나, 튕켜 나오는 물방울을 피하는 놀이를 한다. 가끔은 화장지 걸이에 매달려 화장지를 길게 풀어내는 놀이도 짜릿하다.
인간들이 샘 위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샘의 뚜껑 위에 올라 앉아 온갖 상상의 내를 펼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장실에 홀로 남았다.
아빠 인간은 내가 이곳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나를 그대로 두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때다 싶어 그동안 눈여겨 보아 두었던 샘과 뚜껑 사이의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은 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안에 맑은 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용기 내어 그 틈새로 머리를 들이밀어 보았다. 어라, 머리가 쏙 들어갔다. ‘어깨도 들어갈까?’ 어깨를 들이 밀었더니, 어깨도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샘을 담고 있는 하얀 우물 벽은 너무나 매끄럽고 번들거렸다. 나는 중심을 읽고 그만 우물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어둠이 나를 삼켜버릴 듯이 끌어 당겼다. 순간 내 발에 뭔가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배 털에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이 든다. 샘이다. 그토록 가까이 가고 싶었던 샘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어디에 착륙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방은 캄캄하다. 심지어 하늘도 캄캄하다. 샘에 뚜껑이라고 열어 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토록 동경하던 샘이 눈앞에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캄캄함에 공포가 서서히 밀려왔다. 내 몸은 점점 젖어가고, 그 속에 무겁게 잠겨들었다. 나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개짓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미끄러져 들어 온 틈새를 찾아 다시 그리로 탈출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내게 주어진 탈출구는 오직 하나, 뚜껑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있는 힘껏 날개짓을 하며 머리로 뚜껑을 밀쳤다. 몇 번을 시도했는지 모르겠다. 점점 날개의 힘도 빠지고 의식이 몽롱해져갔다.
그때, 갑자기 샘 안으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엄마 인간이 예전에 읽어주던 성경에서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오는 밝은 빛에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내 눈에도 온통 하얀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빠 인간의 손에 들여 있었다.
그날 밤 아빠 인간은 가족들 앞에서 나의 무용담을 마치 자신의 무용담처럼 늘어 놓았다.
“구름이가 오늘 죽을 뻔했어. 변기 뚜껑 닫아 놨는데, 비데 구멍 옆으로 해서 변기 안에 들어가 버린 거야.”
“으악, 어떻게 구해냈어?”
“변기 속에서 자꾸 파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구름이가 혼자 화장실에 있는 건 알고 있으니까, 얼른 가서 변기 뚜껑을 열어 봤지.”
“그래서? 털이 다 변기 물에 젖었어?”
“응. 조금 젖어 있길래 깨끗한 물로 잘 씻어 줬어.”
“구름아, 왜 그랬어? 너 죽을 뻔했잖아.”
엄마 인간과 누나 인간은 마치 죽었다가 부활한 새를 보듯이 나를 안고 부리를 쓰다듬으며 난리법석을 떤다.
“내가 빨리 발견하지 않았으면 구름이는 저 세상으로 갔을지도 몰라.”
아빠 인간은 자신이 나의 구세주라도 되는 듯이 허풍을 떤다.
“구름이를 잘 보고 있어야지. 혼자 화장실에 두고 방에 들어가 있으면 어떻게 해?”
엄마 인간이 촌철살인 같은 말을 날리자, 그제서야 아빠 인간은 조용해진다.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가 쓴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생각난다. 그 친구는 술을 한 잔 더 하려고 긴 혀를 날름거리다 그만 술독 속에 빠지고 말았다. 구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어떠면 그 친구는 나올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나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 화장실에 있는 샘에 물이 아니라 술이 담겨 있었다면, 나 역시도 그렇게 필사적으로 날개짓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물이기에 나는 더 살아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