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늘 분주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부지런히 떠나간다. 느린듯 빠르고 근사한 듯 우스꽝스런 모습이 목도리도마뱀 같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를 지나 땅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면 하나둘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온다. 마치 태양이 고무줄 소총에 인간을 끌어당겼다가 시위를 놓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처럼.
하루 종일 어디서 뭘 하다 이렇게 돌아오는 걸까?
이 편안하고 따뜻한 둥지를 두고 떠나는 걸 보면,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참 이상하고 안쓰럽다.
예전에 살던 앵무새 카페에 햄스터 둥지가 있었다. 그 녀석은 밥 먹고 나면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인 것 같았다. 어찌나 열심히 돌리던지 마치 지구를 구하기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듯했다. 하지만 바퀴는 그저 돌아가기만 할 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물어보았다.
“너는 왜 그렇게 돌고 또 도니?”
햄스터의 대답은 놀라웠다.
“이 쳇바퀴 안에서 내가 가장 빛나기 때문이지.”
아무리 열심히 돌려도 늘 같은 곳을 맴도는 쳇바퀴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이후 살다 보니 자신의 쳇바퀴 안에서 돌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쳇바퀴를 돌리고 돌리는 시간 안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삶의 방향을 모르더라도 과정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앵무새들도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것 같기만 나름대로 삶의 애환이 있다.
물론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배우자의 비위를 맞추거나 새끼들을 돌봐야 할 책임은 없다. 하지만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결혼하기 전에는 잡생각이 많고, 결혼한 후에는 잡일이 많다는.
내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역시 존재의 이유, 내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야생에 살던 나의 선조들에게는 한낱 배부른 소리로 들리겠지만 말이다. 인간들이 세 들어 사는 댓가로 나에게 제공하는 식량과 간식, 안락함 덕에 나는 여유롭게 삶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누군가는 삶이 이어지니 그냥 사는 것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니,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시간 안에 존재하므로 나의 생명은 그 자체로 나의 시간이다. 곧 죽음은 나의 시간이 다 한다는 뜻이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참 많다. 세 들어 사는 인간들은 시간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다. 식탁 위에, 책꽂이 안에, 텔레비전 아래에, 책상 위에 작은 시계를 올려 놓았다. 나는 대인다운 면모를 가진 새이므로 작은 시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거실 벽 가운데 걸려 있는 가장 큰 시계를 좋아한다. 그 시계 위에 올라 앉아 집 안을 둘러보며 인간을 구경하는 것을 즐겨한다. 그 시계 위에 앉아 있으면 째깍 째깍 가는 초침 소리에 맞춰 나의 심장도 원시의 소리를 내며 박동한다.
심장의 소리가 속삭인다. ‘너의 생명이 조금씩 소진되고 있어.’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고 나는 생명이라는 사실이다. 이걸 소중히 여겨야지. 그래서 나의 고민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왜 사느냐’보다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로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태양이 땅으로 헤딩하다 못해 땅 밑으로 꺼져 버렸는데도 우리 집 인간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단체로 가출하기로 작정했나 보다.
거실에 어둠이 무겁게 내려 앉는다.
어두워지도록 우리 집 인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림...
어두운 우주 한가운데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일까.
삶이 있는 곳엔 늘 기다림이 있었다. 앵무새 카페에 있을 때 나를 데려갈 착한 인간을 기다렸고, 엄마 인간이 사라졌을 때 돌아올 날만 기다렸고, 아침에 일어나 배가 고플 때면 인간들이 빨리 일어나 밥을 주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고, 내일이 있기 때문이고, 나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
‘차량이 입차했습니다’하는 소리.
이 소리들은 나의 가슴 위를 쿵쾅거리며 걸어온다.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너였다가, 다시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
언제쯤이면 기다림에도 익숙해질까. 생명과 기다림은 마치 한 몸처럼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