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의 여정 (2) - 에펠탑, 파리 야경 관람기
프랑스의 랜드마크는 단연 에펠탑이다.
에펠탑이 프랑스를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펠탑의 명성은 자자해서,
유럽여행을 가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필수 코스가 된지 오래이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유럽여행을 '언젠가는 이룰 목표'로
삼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꿈'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간절한 꿈.
필자도 마음 한켠으로는 '살면서 에펠탑을 코앞에서
보는 날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긴 꿈에서 깨어났다.
책에서, TV에서,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에펠탑이 아닌
필자의 시야로 생생하게 비춰지는 에펠탑을 보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렇게 본 에펠탑의 이모저모를 얘기하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점심을 김밥으로 떼우고, 3~4시간 동안 유로스타를 타서
프랑스로 넘어왔으니 허기가 질 수밖에 없었다.
파리의 어느 한식당에서 김치찌개를 저녁밥으로 먹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익숙한 집밥을 먹으니 기분이 묘했다.
배를 채우는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에펠탑 그리고 센 강 위의 유람선에서
파리의 아름다운 밤을 만끽하면 되었다.
그런데 오후 7시 무렵부터 빗줄기가 굵어졌고, 날씨도 쌀쌀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파리의 아름다운 밤을 있는 힘껏 만끽했지만,
'다음날 감기 몸살에 걸리진 않을까?'라고 살짝 걱정을 했다.
다행히 그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에펠탑으로 향했다.
정교한 철골 구조, 은은하면서 강렬하게 발산하는 노란 조명이
필자의 시야를 에워쌌다.
그간 필자가 알고 있었던 에펠탑의 모습은
파리 시내 한가운데 솟아있는 모습뿐이었다.
사이요궁에서 본 에펠탑의 모습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치 눈을 가리고 코끼리의 형상을 알려는 것과도 같았다.
필자는 에펠탑을 너무 몰랐다.
에펠탑 밑을 거닐며, 안으로 들어가며, 위로 올라가며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니 카멜레온처럼 형상이 각각 달랐다.
에펠탑은 프랑스 제3공화정(1870~1940),
나치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1940~1944) 그리고 현재까지
유구한 역사의 기억을 보존하고, 지금도 살아 숨쉬는 산증인이다.
그러므로 여러 형상으로 비춰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에펠탑 위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각각 다르다.
에펠탑의 층은 0층, 1층, 2층, 3층의 총 네 층이 있다.
(우리나라의 1층이 유럽의 0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층은 레스토랑, 탑 중턱의 2층과 꼭대기의 3층이 전망대이다.
필자는 2층에서 파리의 전망을 둘러보았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타워가 존재하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에펠탑과 비교가 가능하겠다.
첫째, 레스토랑의 위치이다.
우리나라의 타워 레스토랑은 맨 꼭대기층에 있는데, 에펠탑은 그와 반대이다.
아마 에펠탑 꼭대기의 공간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입장 절차이다.
우리나라 타워는 표만 있으면 그냥 입장해도 되지만,
에펠탑은 입장하기 전에 소지품 검사를 해야 된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프랑스는 난민 문제로 꽤 골머리를 앓았던 국가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리의 야경은 사진이 온전히 담지 못한다.
파리의 야경은 휘황찬란하기보다는 은은하다.
비유하자면, 밤의 짙은 어둠 속에 은은하게 돋보이는 반딧불이와 같다.
사진은 밝음 속의 형상은 잘 담지만, 어둠 속의 형상은 담지 못한다.
영국 런던 중심부에는 고층 건물이 꽤 있어서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반면, 프랑스 파리는 중심부에도 고층 건물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파리의 야경이 더 은은하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야경의 모습과 분위기 다 좋았는데, 비만 안 왔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되게 추웠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의 소신을 지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이야 에펠탑은 프랑스의 랜드마크가 되었지만,
과거의 에펠탑은 프랑스의 미관을 망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에펠탑을 세운 주인공, 구스타브 에펠(Gustav Eiffel, 1832~1923)은
당대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탑을 철거해야 한다'는 거센 비난을 들어야 했다.
에펠탑은 1887년에 착공하여, 2년만인 1889년에 완공되었다.
300m 높이의 건축물을 '찍어내듯' 만든 것이다.
완공 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89년, 1789년 혁명이 일어난지 정확히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지금의 올림픽과 같은 위상을 지닌 만국박람회(Exposition)도 공들여 준비하고 있었다.
에펠탑은 명백히 프랑스의 중요한 역사를 기념하고자 만든 건축물이었지만,
당대 사람들에겐 프랑스 건축사의 중요한 '오점'을 남겼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만국박람회가 끝나면 에펠탑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를 위한 탄원서를 서명하는 운동도 행해졌다.
에펠은 탑 꼭대기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현재 세계에서 이렇게 높은 건축물은 어디에도 없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각광받을 것'이라 생각하여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의 소신은 옳았다.
모두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맞다'라고 말하는
모두가 '맞다'라고 말할 때,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렇기에 비난과 외면받는 처지를 감수해야 하는
선견지명을 가진 외로운 이가 결국은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에펠탑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는 이미 잘 정리된 동영상이 있으니,
필자는 에펠의 소신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하는 것으로만 갈음하겠다.
(참고 영상 1, 참고 영상 2, 참고 영상 3, 참고 영상 4)
우리나라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프랑스 파리에는 센 강이 있다.
센 강을 중심으로 중세 시대, 근대 왕정 그리고 혁명기의 문화유산이 공존한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역사적 기억이 다양한 유형의 건축물로써 살아 숨쉰다는 사실이
놀라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역사는 부각되기도, 잊혀지기도 하는 불완전한 대상이다.
지금 남겨진, 널리 알려진 역사는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할지도 모른다'라는 의심을 가져야 한다.
프랑스 역사를 사례로 들어보자.
왕정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혁명은 급진적이고 위험한 것이며,
혁명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왕정은 봉건적 잔재로 타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어느 주체가 권력을 쥐느냐에 따라
역사 그리고 그것이 남긴 유산의 운명은 항시 달라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관계인
왕정 그리고 혁명의 유산 모두가 프랑스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역사가 정치 위에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정치의 이해관계만으로 역사를 편향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 수많은 프랑스 역사의 문화유산을 일일이 확인하면 좋겠지만,
영국에서 있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머무는 시간도 길지 않아
그것을 다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센 강의 유람선을 탄다면, 그 문화유산들의 외양을 훑어볼 수 있다.
바토 무슈, 번역하면 센 강의 유람선이라는 뜻이다.
바토 무슈를 타고 오후 9~10시 무렵의 파리 야경을 감상했다.
여러 역사적 기억을 담은 문화유산의 모습도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진다.
각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도 배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데,
'외국어를 몰라서 못 알아먹는 거 아니야?'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한국어 해설도 제공하며, 심지어 한국어로 된 팜플렛도 있다.
지금부터 잠시 독자 여러분에게
센 강을 따라 펼쳐지는 파리의 야경, 문화유산을
감상하는 시간을 주겠다.
관련 설명은 캡션으로 축약한다.
위의 한국어 팜플렛 사진과 함께 살펴보면 더 좋다.
고상하게 관람했기를 바란다.
파리에 갓 도착했을 때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고
'내가 생각했던 파리의 모습이 아닌데?'라는 의문을 가졌더라도,
에펠탑을 보면, 바토 무슈를 타고 파리의 야경을 감상하면
'아, 이래서 파리가 매력적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독자 여러분 마음 속에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감각'이 싹텄기를 바란다.
둘째날 아침~낮의 파리도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다음 글에서 그 이야기를 풀어보기로 하고, 에펠탑도 계속 출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