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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문학의 상관관계

새롭게 바라보는 역사교육 문제 에필로그

by 샤를마뉴

교육과 인문학은 상관이 없을까? 대학에서는 두 요소가 분리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좁은 의미의 교육, 즉 교사로 임용되어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을 하기 위한 길은 제한되어 있다. 사범대학에 다니거나 교직이수를 받는 사람만 그 길을 가기 위한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그 길이 트여 있지 않은 학과에서는 교육 분야를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인문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어문학과/사학과/철학과와 언어교육과/역사교육과/윤리교육과는 같은 듯 다르다. 전자는 인문학 자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후자는 교육학을 인문학과 접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의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의 길을 고수하기 매우 어렵다. 인문계열 학과의 현재와 미래는 썩 좋지 못하다. 이들은 대학에서 우선시되는 구조조정 대상이며, 내부에서도 개설된 강의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수준을 하향하는 것에 더해 학과의 방향성까지 바꾸려고 몸부림친다. 국립대의 인문계열 학과는 '기초학문의 보루'라는 명분이 있어 사정이 낫겠지만, 사립대의 인문계열 학과는 매 순간이 위기이다. 필자는 후자의 사학과에 다니는 학생이다. 무기력한 문과의 광경을 늘 목격하였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교육과 인문학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그렇게 상관관계를 찾아냈다.

교육은 더 나은 미래를 담보한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고사성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나오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교육이 인간을 계발하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는 행위로 비춰지기도 한다. 만약 스승보다 더 뛰어나다는 제자가 스승을 안 만났다면, 혹은 교육이라는 행위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사자성어의 명제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스승은 제자를 교육할 정도의 자격과 덕망이 있어야 할 사람이겠다. 그런 사람도 분명히 부족한 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올바르게 교육된 제자라면 스승의 흠결을 찾기보다는 가르친 행위에 감사해한다. 한편, 흠결을 보고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제자는 더 나은 미래를 향유하고, 또 다른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기도 한다. 이 과정이 연쇄되고, 규모가 커진다면 '세상을 바꾼다.'라는 말도 과언은 아니겠다. 교육은 변화를 매개하고, 현실화한다는 점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

인문학도 더 나은 미래를 담보한다. 인문학은 크게 두 가지의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글과 질문이다. 인간은 정신 아래 행동한다. 행동은 눈에 보이지만,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을 눈에 보이게 정의할 수단이 필요하다. 인문학에서는 글과 질문으로 그것을 정의한다. 인문학에서의 글은 내면의 느낌과 사유를 명료하고 정리된 형태의 언어로 영구히 남기는 과정이다. '고전'이라 칭하는 기록들은 어떤 시대가 되었든 그 내용이 들어맞기에 미래 지향적이다. 10장에서 이를 확인했을 것이다. 인문학에서의 질문은 당연히 여겨지는 명제에 의문을 던져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 뒤집기이다. 그런데 이 뒤집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당연히 여겨지는 걸 한순간에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뒤집어보면, 예상치 못한 새로움(영감)이 도출되기도 한다. 질문을 통한 문제의식의 제기가 당대에는 관심을 못 받아도 후대에 관심을 받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처럼 인문학은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글과 질문이라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인식, 풍토 전반에 풍랑을 일으켜 변화를 유발한다. 교육의 특성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교육과 인문학은 서로 상관이 있다. 두 분야 모두 인간을 다루고, '현재에 심은 씨앗을 미래의 나무로 키우자.'라는 자세가 공통된 점에서 그러하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교육 문제에 목소리를 낼 필요성이 있다. 그것이 인문학의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교육을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여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면, 인문학이 탈바꿈하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꼭 교육학을 공부해서 학교 교사로 임용되라는 뜻도 아니다. 학교 이외의 공간일지라도, 꼭 학생을 대면해서 무언가를 가르치는 행위가 아닐지라도, 사람을 계발시키는 계기를 제공하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길러준다면 그또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이 좁은 의미의 교육에서 설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지만, 넓은 의미의 교육에서 설 공간은 아직 무궁무진하다. 교육을 '교육자만이 다루는 영역'이 아니라 '인문학 고유의 장점을 녹여낼 영역'으로 생각하고 교육과 인문학의 연결이 촉진되었으면 좋겠다. 융합적 사고를 내세우는 현 시대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필자는 여러 예외를 만들며 교육 문제를 고민하고 정의하고자 하였다. 필자가 만든 예외는 학창 시절의 예외, 대학에서의 예외, 사교육업에서의 예외이다. 아직 살 날은 한참 남았지만, 예외에 예외가 거듭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예외는 단정적인 판단을 방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이에 이 시리즈를 쓰면서 역사교육의 예외, 보이지 않는 면을 논했다. 또 하나의 예외가 만들어졌다.

이 시리즈에서 교육 문제를 논의하는 원칙은 학창 시절의 예외를 바탕으로 설정하였다. 필자는 학창 시절, 역사를 유달리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며, 대다수의 학생이 기피하는 동아시아사와 세계사 과목을 공부한 '교육 소수자'였다. 또한, 2015 개정 교육과정의 변화를 처음으로 경험한 '피교육 세대'이기도 했다. 이 세 가지의 특성에서 각각 겪은 문제점들이 대학에서의 예외와 사교육업에서의 예외를 만들어냈다.

평범한 학생의 관점에서 교육 문제를 논의한 것은 참된 교사와 좋은 교육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서였다. 필자 스스로를 정의하는 '평범한 학생'은 모든 걸 무난하게 잘하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다. 어떤 건 완전 잘하고, 어떤 건 완전 못하지만, 그 수치를 평균으로 낼 때 평범한 학생이었다. 들쭉날쭉한 능력치는 강점일 땐 강점이지만, 약점일 땐 한없이 약점이 된다. 애증의 대상이다. 필자 인생의 최저점이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강점도 드러내지 못했다. 역사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내신 시험마다 항상 실수를 해서 틀리고, 대입을 결정짓는 과목인 수학은 바닥을 기었다. 국어, 영어도 썩 잘한 편은 아니었다. 이런 학생을 두고 두 가지의 인식으로 갈릴 것이다. '그래도 역사를 유달리 좋아하니 지켜보면 발전할 수 있겠다.'와 '역사만 좋아하지 나머지는 보잘것 없다.'로 인식으로 말이다. 고등학교에서는 후자의 인식으로 바라본 선생님과 학생이 전자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그 시절은 힘들었고 마음 한구석에 상처를 남겼다. 한편으론, '학교는 평범한 학생들을 대변하는 곳인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교육 문제를 고민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 시절이 마냥 밉지만은 않은 이유이다. 고민의 종착점은 10장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교육 소수자의 관점에서 교육 문제를 논의한 것은 '현재의 교육은 출발선이 같은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학생 노력론'을 일종의 신화로 여기고 새로운 문제의식의 제기를 가로막고 있다. 학생 노력론을 쉽게 정의하면 '주변을 탓하지 말고 학생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려는 의지를 가지면 안 될 게 없다.'이겠다.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이 '우리나라 교육은 문제가 있어요.'라고 의견을 표출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 의견에 대해 어른들은 어떻게 답변을 할까? '문제가 있는 우리나라 교육'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성적이 하위권인 학생'에 초점을 맞춰 '공부부터 하고 문제점을 제기하라.'는 핀잔을 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어른이 잔소리를 더 건든다면, '누구는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등이라더라.'라는 말도 나올 것이다. 이것이 학생 노력론이 새로운 문제의식의 제기를 가로막고 신화로 여겨지는 쉬운 예시이다. 이렇게 교육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뛰어난 사람만이 정의하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교육에는 학생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점이 있다는 걸 간과한 채 말이다. 그 구조적 문제점 중 하나가 출발선이다.

교육 소수자의 출발선과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같을까? 필자는 2장과 3장에서 '그렇지 않다.'라고 상세히 답변하였다. 학생 노력론의 논리를 역이용하는 방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였다. 필자는 학창 시절 '역사 과목이 소외받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일단 고등학교의 동아시아사와 세계사 교과목을 충실하게 공부했다. 그리고 사학과에 진학하여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등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평범한 학생이지만, 필자 나름대로 노력해서 성과를 일구었다. 이 노력을 전교권 학생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것인가? 이렇게 학생 노력론의 잘못된 논리를 역이용해 무력화하였다. 그리고 교육 소수자의 관점, 이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점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학생 노력론의 신화를 허물고 새로운 문제의식의 제기로 나아갔다.

피교육 세대의 관점에서 교육 문제를 논의한 것은 평범한 학생의 관점에서 교육 문제를 논의한 것과 대체로 유사하나, 구조적 문제점에 초점을 더 맞추었다. '뒤집기' 또한 행해졌는데, 그 대상이 학생부종합전형이다. 7장에서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인식이 바뀐 과정, 9~10장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을 둘러싼 환경적, 교육문화적, 시스템적 문제점을 다루었다. 그리고 5장에서 동아시아사와 세계사 교과목 간의 계열성 문제, 6장에서 사설을 통한 역사교육의 공론화 과정을 다루며 역사 과목 및 역사교육의 구조적 문제점을 규명해보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사학과의 관점에서 교육 문제를 논의한 것은 '인문학 전공자가 교육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교육과 인문학의 상관관계를 찾아낸 과정이기도 하다. 필자가 대학에 와서 만든 예외는 '교육 문제를 고민하는 사학 전공생'이라는 정체성이었다. 역사교육과에 다니지도 않고, 교직이수도 받지 아니하지만 학창 시절 겪은 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해보고픈 의지, 역사에 대한 열정으로 그 정체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허나 사학과 내부에서는 그것을 설명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대학의 인문계열 학과가 교육과 분리되었다는 인상을 이때 받았다. 이에 학교 바깥으로 나아가 우연적으로 사교육업과 연이 닿게 되었고, 필자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필자가 몸담은 사교육업은 학생을 직접 가르치는 일이 아닌, 교재와 모의고사를 제작하여 학생에게 공급하는 일이었다. 그 일에 필자가 사용한 주요 능력은 그저 역사에 대한 열정, 글쓰기였다. 인문학 고유의 장점을 녹여냈을 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역사교육에 있어서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교육과 인문학의 힘을 체감하고 서로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여기서 얻은 경험과 확신이 이 시리즈를 집필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4장에서 인문학 전공자가 교육에서 할 수 있는 역할, 8장에서 사교육업 내부를 조명해 교육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시리즈의 편수는 10편 남짓으로 비교적 적다. 글의 양이 많으면 많을 수록, 담는 이야기도 풍성해지겠지만, 좋은 글은 '질적인 글'이다. 독자들에게 10편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시리즈의 제목처럼 역사교육을 새롭게 바라보고, 강한 인상으로 기억되게끔 작용하면 좋겠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하나의 대주제를 가지고 연속적인 글을 처음으로 써봤기에 유의미한 경험이었다. 부족한 부분도 있고,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글의 방향성을 두고 정체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완성될 수 있었던 건, 필자 개인의 의지도 있었지만 이 시리즈를 눈여겨본 소수 덕분이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필자는 계속 역사와 역사교육에 대한 고민을 지속할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를 다른 글로 쓰는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시리즈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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