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바라보는 역사교육 문제 10장
이 장에서는 『에밀』(장 자크 루소 저, 이환 번역, 돋을새김, 2015.)의 내용에 근거하여 교육 문제를 종합적으로 논의한다. 지난 장에서는 수능 해킹의 내용에 근거해 수능의 퍼즐화 현상, 명목에 들어맞지 않는 교과 관련 탐구 활동이라는 교육 현장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실제적인 문제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현상에만 주안점을 두면 그 현상을 만든 근본적인 원인을 바라보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눈으로 드러나는 실제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 실제적인 문제가 왜 만들어졌을까?'라는 내면적이고 깊이 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이 장은 바로 그러한 실제적인 교육 현장 문제의 발생 원인을 고전을 통해서 탐구하는 장이다. 『에밀』을 저술한 루소는 사회 계약론으로 잘 알려진 사상가로, 그의 사상은 사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 그리고 오늘날 사회를 구성하는 정치 이념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사상적 혜안은 교육에서도 투영되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저작이 『에밀』이다. 교육에 관한 주장은 지금도 들어맞는 부분이 많으며, 고찰해보기 충분하다.
에밀이라는 말조차 생경한 독자가 많을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므로 서론에서『에밀』의 내용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에밀은 루소가 이상적인 교육을 행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의 소년이다. 그는 에밀의 성장기를 그려내며 자신의 교육관에 대해 설파한다. 일종의 사고 실험인 셈이다. 루소의 교육 모토는 '자연주의적 교육'이다. 즉, 인간에 의해 규정된 교육 제도, 관념 등에 아동을 종속시키기 이전에, 아동의 흥미를 유도하는 자연적, 감각적 체험을 통해 '스스로 교육되는' 것이 진정한 교육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교육의 단계를 유아기(~5세), 아동기(5~12세), 소년기(12~15세), 청년기(15~20세), 성년기(~결혼)로 나누고 이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에밀은 그렇게 이상적인 교육을 받고 성년이 된 뒤, 그와 비슷한 소피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며 책은 끝을 맺는다. 루소가 오늘날 한국 교육을 봤다면 전형적인 반면 사례로 꼽았을 것이다. 아이에게 놀이 활동을 마음껏 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학원을 하나라도 더 보내 '입시에서만 똑똑한 아이'로 만드려는 게 오늘날 한국의 교육 풍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7세 고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이를 시험의 틀에 종속시키는 현상이 도를 넘었다. 아동의 발달 단계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행위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에밀』의 내용을 간단히 짚었는데, 18세기에 쓰인 교육에 관한 주장을 담은 저서가 오늘날에도 들어맞는 게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교육학 고전'이라 부를 만하다.
『에밀』과 역사교육의 관계도 고찰해보고자 한다. 루소는 책에서 당대 역사교육의 문제에 대해서도 간략히 다루었다. 이 역시 자연주의적인 교육과 상통하는 내용으로, 역사라는 단편적 사실 뒤에 얽혀진 맥락, 관념을 과연 아이가 유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의문을 던졌다. 이 의문은 지금의 한국 역사교육에도 던져볼 만하다.여전히 많은 사람은 역사를 '딱딱한 암기 과목'으로 여긴다. 그 원인을 루소의 주장에 따라 살펴보면, 관념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역사를 기계적(주입식 교육)으로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초중등 교육에서는 역사 과목을 배제해야 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학생 때부터 역사가 재밌어서, 그 재미로 사학과나 역사교육과에 진학하기도 한다. 일종의 덕후 기질이라 볼 수 있겠다. 그 어렵다는 역사를 재밌어하는 학생들을 들여다보면, 학교 수업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계기를 통해 자연적으로 역사에 대한 흥미가 길들여진 경우가 많다. 역사교육에서의 에밀이다. 모든 학생들은 각각의 분야에 흥미와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교육을 받으며, 흥미가 떨어지거나 재능을 발굴하지 못한다면 교육의 잘못이다. 역사교육이 그런 실정이다. 이에『에밀』을 통해 역사교육의 근본적 문제점을 진단해보려고 한다.
역사교육도 실정은 비슷하다. 사람들은 역사란 역사적 사실의 모음집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사실만 알면 아이들이 쉽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이면에 숨어 있는,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결정짓는 여러 관계들에 대한 탐구 없이 역사를 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사건 자체만으로 그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까? 사건의 배후에 있는 맥락들, 원인이나 동기에 대한 인식 없이 어떻게 사건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행위에서 단지 겉으로 드러난 육체적 움직임만 본다면, 당신은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을 것이다. …(중략)… 자연이 아이의 두뇌에게 준 자연성은, 모든 인상을 받아들이게 해준 그 유연성은 왕의 이름이나 지리학에 관한 용어를 새겨넣으라고 준 것이 아니다.
- 장 자크 루소, 『에밀』, 이환 역, 돋을새김, 2015, pp.106-109.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목표와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를 교과서적으로 설명하면, 과거의 고찰을 통해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는 것이다. 진부한 답변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역사를 배우는 목적의 탐구는 뒷전으로 두고 [사실 나열 - 암기 - 시험]의 틀에 갇혀 있다. 역사교육의 '실제'이다. 물론 학생들이 역사 공부를 의미 있게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교육 현상으로 보면, 역사가 [사실 나열 - 암기 - 시험]의 틀로 교육되어 학생들이 달갑지 않은 존재로 여기는 문제가 쉽게 생기는 구조임을 부정할 수도 없다. 위의 내용대로, 역사를 역사적 사실의 모음집이라 생각하며 생기는 괴리이다.
시험의 기형화는 특히 심각하다. 지난 장에서 다루었듯이, 수능의 퍼즐화 현상은 응시 과목 모두를 불문하고 현재 진행형이다. 수능 동아시아사, 세계사를 응시해서 고득점을 받으려면, 제시문으로 나온 사료를 꼼꼼하게 독해하고, 혹은 힌트를 퍼즐처럼 조합해서 문제에서 묻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거나, 수리 계산을 통해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을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이런 시험을 잘 보는 것이 중등 역사교육의 실질적 목표로 치부되고 있다. 물론 필자는 이 실질적 목표의 달성을 돕기 위해 사교육계에 몸담긴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학생들이 도움을 받고 성취를 이루라는 바람에서였다. 내적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 시험의 기형화를 문제삼고 있지만, 그런 기형화된 시험 대비를 위한 일을 한다는 측면에서 그랬다. 시험의 기형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역사교육의 근본적 목표 달성으로의 회복은 요원해진다.
교육 현장에서의 역사 수업 방식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사실 이 고민은 비단 역사교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수법은 아직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교육 현장의 제대로 된 혁신은 새로운 교수법의 전면적 도입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거꾸로 수업'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꾸로 수업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역할에서 벗어나 여러 교육 장치를 통해 학생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수업 방식을 의미한다. 필자는 중학교 때 제대로 된 거꾸로 수업을 경험한 적이 있다. 영어 과목에서 그런 방식의 수업을 했었는데, 매우 효과가 좋았다. 수업이 기다려졌고, 영어 성적도 급상승했다. 하지만 거꾸로 수업은 교육 현장의 '고립된 섬'과도 같았다. 대다수의 교사는 그러한 수업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고, '유치한 수업 방식'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에게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교수법은 '교과목을 요리'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먹는 사람(학습자)이 다시 먹고 싶게 만들거나, 쳐다보기 싫게 만들 정도로 교육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의 역사교육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진 교수법은 전자였을까? 후자였을까? 전자였다면, [사실 나열 - 암기 - 시험]의 틀을 고수해 역사를 버거운 존재로 만든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학생들은 사교육을 통해 후자를 좇은 건 아니었을까? 이런 고민을 던져봐야 한다.
루소가 말하는 이상적인 역사교육은 무엇일까? 언뜻 보면 아이는 역사 속 용어, 역사에 드러나는 내면적 의미를 이해할 만한 수준이 되지 않으므로, 역사교육은 시기상조임을 밝히는 것 같다. 허나 그가 탁월한 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갖췄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 그리고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위 인용 구절의 2~3번째 문장에 주목하면 답이 나온다. 그는 역사를 사실 나열의 방식으로만 전달하는 방식을 문제시했다. 역사를 '해석하는 행위'가 있을 때 진정한 역사교육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의 고민은 시대를 앞섰다. 그가 살았던 당시, 역사는 '역사학'으로 정의할 만한 교육적 토대(독립 분과)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역사교육도 하나의 학문으로 인정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를 단순한 옛날 이야기, 사실의 모음집으로 인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역사에 여러 이면,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학문적 특성'을 간파하여, 역사에는 해석이 필요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해석이 필요하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역사를 교육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역사교육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역사는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변형되므로 편견의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무지나 오류가 사실을 늘리거나 축소시킴으로써 실제를 왜곡하는 일은 그 얼마나 많은가? 동일한 대상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역사가의 판단이다. 당신의 학생이 역사가의 판단에 기대게 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항상 남의 눈으로만 볼 뿐이다.
역사는 종종 과대포장된다는 점도 지적해두어야겠다. 역사는 특정한 시점의 인간을 포착하기 때문에 그 등장인물의 모습을 덧칠하고 때로는 극화시키기까지 한다. 역사서만 봐서는 그 인물의 사적인 면모를 우리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공인으로서의 겉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 루소가 역사의 학문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위의 책, pp.252-255.)
문제는 중등교육 현장은 역사를 해석하는 교육 현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등교육에서의 역사와 대학에서의 역사는 크게 다르며, 이 부분이 학생들에게 괴리를 안겨준다. 사학과나 역사교육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역사가 쉽고 재밌어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역사를 쉽고 재밌게 인식하는 과정은 상당히 보편성을 띈다. 필자 개인도 그렇고,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과정이 비슷하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모종의 계기로 역사에 흥미를 느낀다. (2) 역사에 대한 흥미가 학업으로 연결되어, 역사 과목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3) (2)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역사를 잘 이해한다고 인식한다. 여기서 '시험을 잘 보면 역사를 잘 이해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행위를 주목해보자. 중등교육이 주는 착각이다. 중등교육에서 학생이 학습 목표를 잘 도달했는지 평가하는 기준을 대개 시험으로 규정하였기에 이런 착각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를 교육하는 방식 또한 시험에 종속되어 [사실 나열 - 암기 - 시험]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반면, 대학 역사 공부는 루소가 말하는 대로, 역사적 사실의 이면을 해석하는 '학문적 행위'를 요구한다. 학문적 행위는 결코 사실 나열 - 암기의 방법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 괴리가 막연히 역사가 좋아서 사학과나 역사교육과에 진학한 학생들을 당황케 한다.
중등교육 현장을 무작정 대학 교육 현장처럼 만드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다. 현재의 중등교육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평가하는 방식이 틀렸다고 해서, 학생에게 '역사를 스스로 탐구하라. 그 탐구 과정을 평가하겠다.'라고 하면 잘해낼 학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학생은 탐구자가 아니다. 책 내용에 의거하면, 아동은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직접 느끼는 감각에 익숙하지,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관념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를 할 줄 모른다. 역사 과목을 이해하는 능력을 시험으로만 평가해도 문제이지만, 탐구 활동으로 평가해도 문제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역사교육은 결국 역사를 사실 나열의 대상이 아닌 해석의 대상으로 두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해법은 교수법의 혁신에 있다. 예컨대, 어떤 역사적 개념을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상황과 유인물을 주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상황이 있다고 가정하자. 전자의 상황에서 역사는 사실 나열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교사는 사실을 나열하고 학생은 그걸 암기한다. 반면, 후자의 상황에서 역사는 해석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유인물에 어떤 역사적 개념에 대한 생각을 쓰라 하면, 학생은 그것에 대한 해석을 시작할 것이다. 토론을 하게 되면, 스스로 해석한 역사적 개념과 다른 학생, 교사가 해석한 역사적 개념을 비교할 것이다. 다만, 토론을 할 때는 '정답은 없다.'란 걸 전제해야 한다. 이렇게만 해도 학생은 역사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모음집이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있고 해석해야 하는 대상임을 인지하게 된다. 역사에 대한 흥미도 길들여지고, 자발적으로 탐구할 동기도 생겨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교사는 학생의 생각을 유도하는 유인물을 만들고, 토론을 통해 학생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역할만 행했다. 루소의 교육철학과 부합한다.
아이는 단지 이미지(심상)만 받아들인다. 이미지가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그림이라면, 관념은 그 그림들 간에 정의된 개념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미지는 단편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관념은 모두 다른 관념을 필요로 한다. 즉, 대상과의 관련에 대한 이해 없이 관념은 형성되지 않는다.
- 위의 책, p.104.
당신이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쳤다고 치자. 그리고 아이가 무엇을 배웠는지 확인해보라. 아이 마음대로 질문하고 얘기하도록 놔둬라.
- 위의 책, p.87.
잘못을 스스로 교정할 때까지 기다려라. 그가 오류의 샛길로 빠지면 빠질수록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교육의 핵심은 많은 지식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의 두뇌 속에 보다 명료한 관념을 심어주는 데 있음을 잊지 말라.
- 위의 책, p.172.
'부담을 더는' 교수법의 혁신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교수법의 혁신은 교육자가 전적으로 노력해야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혁신으로 내세운 학생부종합전형이 실패한 이유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부담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은 성적 관리도 하면서 스펙을 쌓아야 하니 부담되고, 교사는 여러 일이 많은데 학생 스펙도 관리해줘야 하니 부담된다. 이렇게 되면 부담이 가중되는 걸 감수하면서 혁신을 이룩할 바에는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기 십상이다. 루소는 책에서 아이에게 부담을 줄 만한 교육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강하게 밝혔다. 학생부종합전형이 안 하느니만 못한 전형이 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학생부종합전형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교수법의 혁신이 더욱 필요했다. 그러나 교수법은 낡은 방식이 고수되었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교수법이 달라지지 않은 채, 수행평가의 비중을 늘리고 억지로 교과 관련 탐구 활동을 시켜 생활기록부를 포장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 보여주기식이다. '부담을 주지 않는 수준'의 토론식 수업, 거꾸로 수업 등의 교수법을 통해 교육의 역할을 일정 부분 학생에게 위임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교육의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결국 교육문화가 변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평범한 학생을 고를 것이다.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특출난 재능을 지닌 아이는 저절로 성장하겠지만 평범한 아이는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런 아이의 교육만이 교육 일반에 대한 본보기로서 의미 있는 사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위의 책, pp.30-31.
아이들은 저마다 고유한 정신적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에 맞게 지도해야 한다. 아이의 본성과 성격을 관찰하라. 그를 위해 오래도록 지켜보라. 싹이 자유로이 움틀 때까지 기다려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급해하지 말라. 그것이 낭비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 방법이야말로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 위의 책, p.84.
경솔한 판단으로 아이의 장래를 그르치지 말라. 겉보기에 아이가 우둔해 보여도 실제로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다. 아이를 서둘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 시절을 존중하라.
- 위의 책, pp.102-103.
학교는 평범한 학생들이 주인공이 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풍조의 주요한 문제점은 스스로에 대한 탐구를 등한시하고 1등을 좇는 것이다. 1등으로 규정된 그 한 명에 들어가기 위해 99명의 인간은 사투를 벌인다. 이게 하나의 문화가 되어 교육에도 침투하였다. 잘못된 교육문화가 만들어졌다. 학업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을 선별하여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노력이 평범한 학생들을 도야하려는 노력보다 우선시되고, 명문대에 몇 명을 진학시킨 게 좋은 고등학교의 지표로 평가받는 풍조가 과연 정상일까? 이런 풍조는 평범한 학생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고 공교육을 불신하게 만든다. 교수법과 함께 혁신되어야 할 부분이 '1등 아니면 없는 문화'이다. 교육의 본령을 실현하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다.
평범한 학생들은 정말 평범할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각각 어떤 분야에 대한 흥미와 재능이 있지만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는 게, 어렵지만 교사가 해야 할 역할이다. 어떤 계기로 잠재력을 일깨울 수 있는지,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을 기다리지 않고 재촉하는 부모와 교사가 많은 게 현실이다. 학생이 학업 성적과 관련 없는 분야에 흥미를 느끼고 골몰하면, 그것을 지켜보고 기다려줄 요량이 있는 어른이 많을까? '그런 거 할 시간에 공부나 해!'라고 다그칠 어른이 많을까? 씁쓸하지만 후자이다. 평범한 학생을 어른이 기다려주지 않는 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회 풍조의 측면으로 보면, '좋은 대학(1등) = 성공'이라는 공식이 뿌리내린 것, 인간 자체의 측면으로 보면, '눈에 보여야 남들의 이목을 받는 특성'이 그 원인이다. 이로 인해 평범한 학생을 기다리기 전에 자연히 성장할 특출난 학생을 더 밀어주고, 학업 성적이 안 좋으면 실패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잘못된 교육문화가 형성된다. '비범함이 숨겨진' 평범함이 죄로 취급받는 세상이다.
몇 가지 현실적인 한계는 인정하겠다. 필자 스스로도 교육자의 입장에 있다면, 수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관찰하는 행위를 하거나, 특출난 학생을 눈앞에 두고도 평범한 학생을 바라보기 어려울 것임을 인정한다.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이유는 평범한 학생들이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학교는 교사 개인의 노력으로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노력, 사회적인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문제 해결이 현실화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해법도 교수법의 혁신에 있을 것임을 분명히 확신한다. 평범한 학생의 목소리, 비범해지려는 흔적이 묻는 교수법이 가이드라인 역할을 해줄 때, 교사가 학생 개개인을 파악하고 지도하는 행위가 원활해질 것이다. 단기간에 바뀔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우선 교사 개인이 '참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 건 필요하다. 평범한 학생은 참한 어른을 만나야 한다. 참됨이 그릇됨을 덮어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한 인간을 교육시키기 전에 선생 자신부터 인간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아이에 대한 이상적 모델을 스스로의 내부에 갖추어 놓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아직 지식을 갖추기 전에는 아이가 봐도 좋을 것만 보도록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있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라. 당신이 주위 사람의 선생이 되지 못한다면 아이의 선생 역시 되지 못할 것이다.
- 위의 책, p.85.
당신의 학생에게 당신의 약점을 보여줘라. 그와 같은 갈등을 당신도 겪고 있음을 알게 하라.
- 위의 책, p.286.
역사(혹은 인문학) 공부를 하겠다는 학생을 만나면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렇게 하라.'며 흔쾌히 수락할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인문학이 경시되는 우리나라 풍토가 학생의 장래를 가로막는 건 아닌가하는 의문이 있어서이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이 그런 것 또한 아니다. 사람들, 혹은 사회가 '인문학을 하면 굶어죽는다.', '집에 돈이 있으니 여유롭게 인문학이나 한다.' 등의 낭설과도 같은 의견이 떠돌아다닐지라도, 교육에서는 낭설에 휘둘리면 안 된다. 아이의 가능성과 성장을 믿는 교육의 본령에 충실하다면 더욱 그렇다. 안타깝게도 역사교육이 낭설에 휘둘리는 판국이다. 이에 휘둘린다는 증거는 세계사 기피증 문제(2장), 교육 소수자 발생 문제(3장) 등을 통해 논의한 바 있다. 역사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들은 공교육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낭설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바로세워야 한다. 학생은 낭설의 예외를 보여줄 잠재력을 믿어야 하며, 교사는 그 잠재력을 학생에게 믿게끔 해주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학생에게 투영하면 안 된다. 교사와 학생 모두 스스로가 중심이 되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 1등 아니면 없는 문화가 혁파되어야 하는 이유는 평범한 99명의 학생이 그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1등만을 좇아 각자의 분야에서 1등이 되는 중심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1등의 개념을 재정의해야만 한다. 그리고 재정의된 1등을 어떤 꿈을 가지든, 어떤 분야에선 뒤처질지라도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평범한 학생들이 차지하여야 한다.
(에밀은) 자기가 하는 일에 있어서는 최고가 되기 위해 성심을 다할 것이다. 달리기를 할 때는 가장 빨리 달리려고 할 것이며, 싸움을 한다 해도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능숙하고 솜씨 좋은 장인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의 명예욕은 그 정도일 뿐이어서, 더 이상의 욕심으로 그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유식하다든지, 더 돈이 많다든지, 더 존경받는다든지 하는 등등의 일에 그는 무관심할 것이다.
- 위의 책, pp.289-290.
사교육 팽배 현상은 공교육, 사회가 평범한 학생들을 제대로 바라봐줄 때 바로잡힐 것이다. 평범한 학생이 자신의 잠재력을 모르기 때문에, 통상적인 기준인 성적에서 우수하려고 사교육을 찾게 되는 것이다. 사교육을 아무리 때려잡아도, 공교육 그리고 사회 풍조가 변하지 않으면 헛수고이다. 공교육은 모든 학생을 책임지지 않는 교육이라는 인식이 공고해지는 요즘이다. 사회는 어느 대학부터 명문대라느니, 재산이 얼마나 있어야 한다느니와 같은 각종 속물적 기준으로 성공을 정의하는 요즘이다. 이 요즘에 사교육에 대한 열망이 부풀어 문어발이 되었다. 루소가 에밀에서 밝힌 주장을 경구로 삼아, 팽배되는 잘못된 관념, 문화를 꺼뜨리고 올바른 관념과 문화를 공교육, 사회에 바로세워야 한다.
이 장에서는 루소의『에밀』이라는 책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교육문화의 문제점을 규명하였다. 여기서 밝힌 교육문화의 문제점은 정체된 교수법, 1등 아니면 없는 문화이다. 책에 따르면, 아이는 이미지, 감각의 발동으로 얻어진 경험의 수용은 쉬우나, 내면적 그리고 언어적으로 규정된 관념의 수용은 어려워한다. 이 관념을 억지로 수용하는 것은 오히려 어떤 대상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우리나라 교육은 보편적으로 교사가 전달자가 되고, 학생이 수용자가 되는 일방향식 주입식 교육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교육 방식은 놀이와 체험보다는 책에 수록된 지식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학생의 흥미를 떨어뜨린다. 흥미가 저조해지면 아이에게 중요한 '자발성'의 함양 역시 어려워지게 된다. 그러므로 교수법의 혁신은 필요하나, '일반화된' 시험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방식을 개편하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그 배경에는 1등 아니면 없는 문화가 교육에 침투한 것이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학생부종합전형이 도입되면서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드러나게 되었고, 여전히 학교에서 평범한 학생들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에밀』을 역사교육의 관점에서도 해석하였다. 루소는 표면적인 기록으로 나타난 역사를 사실로 곧이곧대로 수용하면 안 되고, 보이지 않는 이면을 해석해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역사를 비판적, 학문적으로 고찰하는 자세가 교육에도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중등 역사교육의 경우, 역사를 해석하기보다는 [사실 나열 - 암기 - 시험]의 틀로 교육하고 있다. 때문에, 역사에 우연적인 흥미를 가진 학생들 중에는 중등교육 하에서는 시험 성적이 잘 나와 '스스로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다가 역사를 학문적으로 교육하는 사학과, 역사교육과에 진학해서 괴리를 느끼는 경우가 있다. 교육과정에서 나타나는 괴리로 학생이 어떤 학문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을 갖지 못하게 되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인문학 경시, 1등 아니면 없는 문화라는 우리나라 풍조가 역사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역사를 좋아하고, 거기서 재주를 펼칠 잠재력이 있는 학생들도 냉정한 현실을 못 이겨 꿈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다. 역사교육에 내포한 문제 역시 교육문화의 변화를 통해 개선시켜야 한다.
구성원 그리고 구성원이 만들어내는 문화는 유동성이 크다. 다양한 모습을 창출한다는 뜻이다. 쉬운 예시를 들겠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분위기와 나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분위기가 같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제도를 만들어놓아도 그 제도를 시행하는 사람, 지키는 사람이 형편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인문학 그리고 교육학 고전인 에밀을 통해서 '현재의 교육문화는 무엇이 문제일까? 좋은 교육문화는 무엇일까?'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이 부분은 에필로그에서 별도로 다시 얘기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여기까지 해서 '새롭게 바라보는 역사교육 문제'에 관한 열 꼭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