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바라보는 역사교육 문제 7장
시리즈의 후반부(7~10장)는 두 가지의 대주제에 대해 각각 두 편씩 글로 옮기고자 한다. 두 가지의 대주제는 첫째로, 필자가 지난 2년간 몸담은 사교육계에 관한 경험과 생각, 둘째로, 교육 서적 리뷰이다. 이 대주제들로 광의의 교육 문제도 논의한다. 여기서 광의의 교육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쟁점 혹은 화두가 되는 교육 문제와 미래'이다. 이미 초중반부에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굵직한 문제들을 논의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후반부는 경험 회고, 미래 전망의 방식으로 가벼우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방식으로 마무리하는 게 흐름상 좋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 장에서는 필자가 사교육계에 몸담게 된 과정을 얘기하고자 한다. 그 과정을 몇 개의 단어로 정리해보자면, (1) 과거와 현재의 연결, (2) 운과 기회의 작용, (3) 생각의 수정 및 성장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1)~(3)을 이어주는 매개체는 사교육계에 있던 시기의 경험들이다. 이 장에서는 (1)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다음 장에서는 (2), (3)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풀 것이다. 나름의 서사가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고 영감을 얻었으면 좋겠다.
필자의 과거, 즉 학창 시절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시행착오는 결과론적으로 실패이지만, 과정론적으로는 성공이다. 그러나 학창 시절은 결과론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과정론적으로만 성공한 필자는 학창 시절에 그리 각광받는 학생이 아니었다. 대학에 오고 난 이후, '과정의 성공보단 결과의 성공을 추구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후회가 들기도 하였다. 수시 제도에 대한 회의로 이어졌다.
필자는 공교육을 믿었던 학생이었다. 충실히 학교에서 주어진 공부를 하고, 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면 성공적으로 내로라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사교육은 믿지 않았다. 자기 주도적인 공부가 아닌 타율적인 공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바라본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의 모습은 스스로 공부하려는 의지 없이 그저 학원에서 주어진 숙제를 기계적으로 풀었고, 자기 계발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지 못하고 학원에 끌려다니는 모습이었다. 그런다고 막상 성적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필자는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학원에 다니지 않고 공부하여 준수한 성적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도 그러리라 생각했고, 공교육에 대한 믿음은 여전하였다.
고등학생 때 공교육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학교에서 주어진 공부를 충실히 해도 급격히 어려워진 시험들을 잘 보기 어려웠다. 특히 수학은 심각하게 못했다. 결과론적 성공이 요원해졌다. 이에 필자는 결과론적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과정론적 방법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학생부종합전형이었다. 필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학생들에게 학생부종합전형은 사막 위의 오아시스이다.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비교과 활동(대표적으로 교과별 세부능력특기사항, 동아리 활동, 수상 실적이 있다.)을 차곡차곡 스펙으로 만들어 대학에 합격한 학생의 사례들이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상태에서, 신기루처럼 필자를 유혹하였다. 공교육의 결과론적 측면에 대한 믿음은 흔들렸지만, 과정론적 측면에 대한 믿음은 공고해진 셈이다.
문제는 과정론적 방법을 통한 성공의 출발선이 달랐다. 그렇지만 당시의 필자는 이를 몰랐다. 어떤 학교를 다니든, 어떤 교사를 만나든 나 자신이 열심히 과정론적 노력을 일구면 성공이 뒤따를 것이라 생각하였다. 진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랬다. 필자는 역사를 좋아했으므로 당연히 '사학과, 역사교육과 진학'을 목표로 과정론적 노력을 하였다. 그 목표를 이뤄야 했기에 절박했고 열정적이었다. 허나 노력이 온전히 결과로 반영되진 못하였다. 그 원인이 출발선이 달랐던 것에 있었다. 필자가 비교과 활동에서 특히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부분은 동아리 활동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챙겨야 신기루의 대학 합격 사례의 주인공이 필자가 될 수 있다는 피상적인 믿음이 열정의 불기둥을 만들었다. 그런데 필자가 마주한 고등학교의 역사 동아리는 존폐 위기에 처해 있으며, 어떠한 체계도 없었다. 여기서부터 체계가 있고 잘 돌아가는 동아리에 들어간 학생들과 출발선이 달라진 셈이다. 그래도 열정을 다하면 출발선의 격차는 신경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격차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도 분명히 많았다. '과정에서는' 그렇다. 역시 그 노력이 결과로 온전히 반영되지 못했다. 공교육의 과정론적 측면에 대한 공고한 믿음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을 기해 공교육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붕괴하였다. 과정론적 측면에 대한 믿음, 공교육에 대해 남아있는 반쪽짜리 믿음이 없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은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고등학교 3년간의 전체 성적, 생활기록부를 통해 '너는 지금 이 정도 수준이다.', '너는 이 정도 라인의 대학을 써야 한다.'가 결정난다. 그렇게 바꿀 수 없는 심판이 내려진다. 참으로 잔인하다. 이 심판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수능을 잘 치는 것밖에 없다. 물론 수시와 수능을 고루 잘 준비한 학생이라면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그런 학생보다는 필자처럼 수시 제도에 올인해서 수능 준비는 하지도 않은 학생, 내신 성적은 잘 나오나 모의고사 성적은 잘 나오지 않는 학생, 입으로만 정시 파이터를 외치는 학생들이 다수를 이루는 게 일반고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여건에서 그 하나가 실패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인 것이다. 필자는 이 최후의 심판에서 진실을 깨달아버렸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어두운 면을 보아버렸다. 그 순간 과정론적 측면에 대한 믿음은 부서졌다. 선생님들과 대학 교수들은 부족한 면이 있지만 성실하게 노력한 학생보다는 전교권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을 좋아하였다. 전자의 학생과 후자의 학생 간의 격차는 상당하였다. 전자의 학생에게 돌아온 건 '그동안의 노력이 뭐가 된 거지? 성적을 더 챙길 걸.'하는 후회와 서류심사부터 탈락하는 좌절이었다. 그렇게 공교육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다행히 대학은 갈 수 있었다. 연이은 탈락 행진 속 딱 하나의 대학이 마지막 동아줄을 건네주었다. 기쁘기보다는 겨우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었다. 그렇지만 '힘겨운 대학 합격'이라는 결과가 있기까지 뒤따른 고난과 '절실히 믿었던 것이 틀렸다.'는 사상적 충격은 꽤나 큰 상흔을 남겼다. 이 상흔은 필자에게 반정립이었던 사교육을 정립으로 보게 하고, '생각의 전향'을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학창 시절에 경험한 시행착오의 과정론적 성공이 대학에서의 결과론적 성공으로 싹트는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교훈을 얻는 게 역사의 본령이다. 위의 회고에서 볼 수 있듯이, 필자의 과거인 학창 시절은 힘든 기억이 많다. 솔직히 기억해내기 불편한 구석도 많다. 그럼에도 과거의 기억을 소환한 건, 이를 명확히 직시해야 현재와 미래에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괴롭게 하는 기억은 날려보내서 잊는 것이 이롭다. 다만 괴로움을 잊는다는 목적으로 현재의 자신이 있기까지 영향을 끼치거나 전환점을 만든 기억까지 날려보내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필자가 학창 시절에서 어떤 것을 얻었고, 어떤 것에 문제의식을 가졌으며, 그것들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풀어보겠다.
'역사하는 사람을 돕는다.'라는 불변의 마음가짐을 제일 먼저 꼽아보겠다. '불변'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필자는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적절한 도움을 받아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이를 달리 보자면, 정작 그런 학생이었던 과거의 필자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에 뜻이 있는 학생들에게 교육 현장은 척박한 땅이며, 교육 현장 안에서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사각 지대 안에 있다. 그게 사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사회 안에서의 역사학도들도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허덕이고 있다. 사회는 냉정한 곳이다. 사회는 어른의 공간이기 때문에 냉정함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교육 현장에서까지 냉정해야 할까? 학생들은 그 냉정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말이다. 그것이 필자의 강력한 문제의식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미 3장에서 얘기한 바 있다. 우리나라 교육 현장은 역사에 흥미를 가져 공부하려는 학생, 역사를 통해 학교에서 과정론적 노력을 일구는 학생에게 냉랭하다. 학생 모두를 대변하고, 학생에게 따뜻함과 희망을 주면서 동시에 성장을 이끌어야 하는 공교육의 사전적 정의와 맞지 않다. 필자가 냉랭한 교육 환경에서 고생을 치른 것이, 필자 다음의 학생들에게는 이런 고생을 치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교육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선봉장이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도 하나의 큰 깨달음이었다. 학창 시절 필자는 학생부종합전형에 모든 것을 걸었다. 위험한 행위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적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이상, 걸어볼 것은 과정론적 노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정성적 평가 요소라 평가자의 주관에 모든 게 달려있는 비교과 활동에 투자할 시간을 정량적 평가 요소인 성적 향상에 더 쏟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있다.
필자는 학생부종합전형의 문제점 중 하나가 '기초학력 결여'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와서 생각이 바뀐 순간 중 하나가 수능으로 대학에 간 학생들이 학점을 꽤 잘 받는다는 것이었다. 일반고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일반고에서 수시의 도움 없이 수능으로만 대학에 가겠다는, 일명 '정시파이터'는 불성실하다는 인상을 준다. 선생님들도 재수, N수생과 겨뤄야 하는 수능보다는 수시로 대학에 가길 권유하며, 그 권유를 거부하면 꽤나 큰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수업 시간에 수능 공부를 하지 못하게 막은 선생님도 있었다. 그래서 일반고에서 수능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하면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야 한다. 자연스레 '반항아', '불성실한 학생'이라는 낙인이 따라오는 건 덤이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의 변화가 왜 일어났을까? 대학에서 교양필수이자 기초학력을 어느 정도 요구하는 과목들(예컨대, 대학 영어와 수학이 있다.)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목들에서는 대학에서 학문을 수학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수능을 중점적으로 공부한 학생들의 평균 학점이 높았다. 오히려 필자처럼 몇몇 과목 성적이 만회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족하면 물을 먹기 십상이다. 대학 입학 정원에서 수시 제도의 비중을 줄이고, 정시 제도의 비중을 늘린 것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여러 활동에 적극적인 것도 좋지만, 그에 앞서 학문을 수학할 수 있는 기본기를 대학에서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에서 여전히 '수능으로 대학을 가는 것은 큰 리스크다.', '(불투명한) 학생부종합전형이면 학업 성적이 낮아도 내로라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계란을 한 바구니에만 담게 하고 정작 그 바구니의 계란이 모두 깨져버리면 나몰라라하는, 매우 나쁜 행위라고 본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만 담았던 필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순기능을 부정하진 않는다. 이런 전형이라도 있었기에 필자가 대학에 갈 수 있었고,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들이 오늘날의 자양분이 되었다. 만약 필자가 교사라고 가정할 때, 학업 성적은 잘 안 나오지만 평소에 성실한 학생이 있다면, 그를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 있게 성심껏 지도했을 것이다. 다만,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는 전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이 쏟아부은 과정론적 노력만큼 결과가 뒤따르며, 잘못된 길(헛수고)에 빠지는 위험도 없어진다. 필자는 학생부종합전형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그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없었다. 당연히 시행착오가 생길 수밖에 없으며, 결과론적으로 평가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그 과정론적 노력을 온전히 알아주기는 어렵다. 학생 입장에서 봤을 때도 가이드라인, 기초 지식 없이 학생부종합전형을 준비하는 것은 노력에 비례한 결과값이 안 나오며, '소화불량'을 일으킨다. 소화불량의 예시를 하나로 들자면, 역사를 좋아하나 방향성이 없는 학생이 교과별 세부능력특기사항의 기재를 위해 탐구 보고서를 쓴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탐구 보고서를 쓰기 위한 몇 가지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할 것이다. 열거하자면, 무엇을 탐구했는지, 탐구를 어떻게 했는지, 탐구로 얻은 지식은 무엇이고 잘 이해했는지, 내게 무슨 영향을 주었는지 등이 있겠다. 이런 것 없이 '억지로' 쓴 보고서는 교사 입장에서도 이를 어떻게 교과별 세부능력사항에 기재해야 할 지도 난감하고, 학생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문제점을 명쾌하게 짚은 교육 서적이 있다. 그 서적을 리뷰하는 장에서 더 자세히 짚어보겠다. 요지는 학생부종합전형이 이른바 '전교권 몰아주기'가 아니라 평범한 학생들에게 수혜를 주려면, '표준적이면서 구체적인 장치(시스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바로 그 표준적이면서 구체적인 장치가 수시와 수능을 불문하고 매우 열악했다. 그래서 필자는 학창 시절 그리고 대학 입학 후 '개인적으로나마 그런 장치를 만들어보고 공유해보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바로 '평가원 모의고사/수능 역사'였다. 역사를 흥미를 가지고 공부한 학생이 결과론적으로 성취를 거둬야 하는 분야인데, 정작 그 성취를 거두기 어려운 환경이었다는 것이 문제의식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필자는 유명 수험생 커뮤니티에 아마추어적이긴 하지만, 평가원 모의고사/수능 역사를 효과적으로 대비하는 학습 칼럼, 스스로 평가원 양식을 연구해서 만든 모의고사 문제지를 공유하였다. 예상 외로 상당히 뜨거운 반응을 보인 데다, 커뮤니티 운영진 측에서 Best 학습 자료에 등재해주기까지 하였다. 당시에는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도움을 받고, 방향성을 잡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열정적으로 커뮤니티 활동을 했었다. 일종의 취미였던 셈이다. 후일 이 취미는 현재의 필자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과거의 물질적 유산'이 되었다.
관련 게시글
과거의 유산이 현재로 연결되는 과정은 사교육계의 입성을 통해 우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우연적 연결이 사장될 뻔한 과거의 유산을 부활하게 만들었다. 사실 필자는 교육적 사명감의 실현을 위해 사교육계에 몸담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경제적 문제 해결이라는 현실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었다. 대학 생활은 수입보다는 소비가 많아 경제적으로 허덕이는 시기이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마련한다. 대학생에게 '교육업'이란 매우 매력적인 황금 돼지이다. 다른 직종의 아르바이트에 비해 수입이 높고, 몸이 아니라 머리만 굴리면 돼서 편한 게 그 이유이다. 게다가 조금 길게 일하면 경력이 되어 취업 준비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그래서 '돈을 좀 편하게 벌고 싶어서' 사교육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업으로서 본' 사교육계는 필자에게 많은 놀라움을 선사하였다. 학창 시절에 학원을 한 번도 다니지 않아 사교육의 사짜도 몰랐기에 더욱 그러했다. 사교육은 공교육의 대립항이다. 그러므로 사교육의 목적, 운영 구조 등은 공교육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그 다름에 필자가 생각하던 정답이 있었다. 사교육은 이미 표준적이면서 구체적인 장치, 양으로도 질로도 우수한 장치를 갖고 있었다. 필자는 이미 공교육의 틀에서만 역사를 공부했을 때 '교육 장치 부재'라는 문제점을 느꼈고, 아마추어적으로 해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고, 사교육은 한 발 더 앞서가 '전문적인 교육 장치'를 설계해 문제점을 해결해버렸다. 효과적으로 학습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교재, 모의고사가 기계처럼 찍어져 나오고 있었다. 머리를 핑 스치는 충격이지나가면서 동시에 새로운 열망이 생겨났다. 나도 전문적인 교육 장치를 직접 만들어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필자는 전문적인 교육 장치를 '미리 보고 검토하는 사람'으로 사교육계에 첫 발을 내딛뎠다. 쏠쏠한 용돈벌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놀라운 광경을 보다보니 그 놀라움을 창조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 같다. 놀라움을 창조하는 순간부터는 용돈벌이로 접근하면 안 된다. 요구하는 능력, 업무의 수준도 급격히 높아진다. 이 때에 뒤로 접어두었던 교육적 사명감이 피어났다. 놀라움을 창조하는 단계, 즉 집필진 시절의 에피소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얘기하겠다.
이 연결로 인한 생각의 전향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 믿지 않았던 사교육의 위력이 이렇게나 대단하다는 걸 실감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소 공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무너진 상태였다. 무너진 믿음의 벽을 사교육이 다시 세웠다. 그렇게 공교육의 틀 안에 있었고, 과정론적 노력을 통해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을 간 학생은, 사교육의 틀 안에 있으며 결과론적 성공부터 담보해야 과정론적 성공도 따라온다는 생각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필자는 공교육의 틀에 있었든, 사교육의 틀에 있었든 '역사하는 사람을 돕는다.'는 마음가짐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그 마음가짐을 현실로 이루는 수단을 사교육으로 변경했을 뿐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이런 생각들을 할 것이다. '나는 좋은 교사도 많이 만났고, 수시 제도의 순기능이 잘 발휘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사교육을 받았던 사람으로써 사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보는데, 사교육을 예찬하는 것 아닌가?'와 같은 생각 말이다. 전부 맞는 지적이다. 이 장에서는 필자가 공교육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사교육에 대한 믿음이 생기는 부분만을 의도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그런 질문들을 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그럼에도 사교육이 정답은 아니고, 공교육의 회복을 바라는' 요지를 밝힘으로써 서사를 균형 있게 완성할 것이다.
한편으로, 필자의 서사가 '역사교육 문제 논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에 답하자면, 상관이 있다. 서문을 참조하길 바란다. 필자는 서문에서 밝힌 네 가지 원칙 중, 교육을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얘기할 것을 첫 번째 원칙으로 밝히며, 학생부종합전형의 문제점을 간단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장은 그 첫 번째 원칙을 충실하게 지킨 글이다. 시리즈를 연재할 때부터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안이다. 역사교육을 좁은 의미로 본다면 '교과목으로서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이겠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을 성장시키는 교육'도 포함될 것이다. 시리즈의 전반부는 전자에 초점을 뒀다면, 후반부는 후자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한 개인의 진솔한 이야기를 다음 장에서도 계속 지켜봐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