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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사로잡힘

고혹적인 두려움

by 김지현

2020년 2월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네 가족은 남은 겨울 한 조각을 붙잡고 기억하느라 조촐한 1박 2일 여행을 떠나와 있었고 그 시기는 하필 국내에 코로나 감염자가 처음 생기던 시점이었다. 날씨는 매섭게 추웠지만 펜션의 지글지글한 온돌방에서 바라보는 마당 풍경은 따끈하게 데운 청주를 마시고 싶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 보면 안 될 것들을 보고 말았다.


네이버 뉴스.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의 뉴스는 아늑하게 늘어져있던 말초신경들을 샅샅이 훑어 자극하고 동공을 확대시켰다. 내가 지금 휴가 중이자 여행 중이라는 것도 새까맣게 잊을 만큼 고혹적이었다. 포털사이트에 실린 각종 신문사의 기사들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질병에 대한 온갖 추측과 예상으로 도배되었다. 나 역시 국내에 들어온 이 질병이 과연 무엇인지 소시민정도의 궁금증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딘가 조금씩 이상해졌다.


기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감정적으로 허기졌다.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스크롤을 내려가며 수십 개의 기사를 클릭했다. 눈이 아려오도록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는데도 저 아래 아직 보지 못한 수백 개의 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클릭한 기사 제목은 자주색으로 표시되었고, 그렇지 않은 제목은 아직 파란색이다. 파란색의 제목이 발견될수록 다른 의미에서 기뻤다. 한편으로 기진맥진했고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설레어 서둘러 클릭해 기사를 먹어치웠다. 이걸 다 읽고 나면 저걸 읽어봐야지. 하지만 클릭할수록 무언가 조급해지고 초조해졌다. 실체도 없는 이 질병이 이불속 내 발밑으로 기어들어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휴가지에 와서 남편과 아이들은 한갓지게 드러누워 있는데 나는 온몸을 웅크려 미간을 찌푸려가며 기사를 읽었다. 시국이 이러한데 어쩜 저렇게 태평할 수 있지? 지금 우리나라에 감염자가 나왔다잖아. 퍼지는 건 순식간이래잖아. 기사를 읽을수록 내 몸은 점점 동그랗게 말려 공벌레처럼 변해갔다.


두려움이었다.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곧 죽어도 미련이 없을 것만 같던 나는 적어도 기사를 보던 그 당시 생에 대한 집착이 가득했다.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나에겐 책임질 아이들이 있고 해야 할 일도 많아. 게다가 유래없는 질병으로 사람들에게서 '격리’된다는 공포는 말할 수 없이 커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관계지향적이었던가.


그렇게 네이버 뉴스기사들은 내 두려움의 머리채를 에둘러 휘어잡고 이리저리 비틀었다. 나는 속절없이 끌려다녔다. 코로나에 걸리고 싶지 않아 이 질병에 대한 더욱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줄 사람은 국내에 아직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인터넷 창을 끄고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잠시 뒤에 다시 폰을 들고 아직 읽지 않은 파란색 제목의 기사들을 끊임없이 클릭, 클릭, 또 클릭…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를 엄청난 양의 정보들만 습득해서 남편에게 감염자의 개인사를 줄줄 읊을 정도가 되었고 잘 쉬고 있던 남편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저 여자 왜 저럴까, 지금 대문 앞에 코로나가 우릴 먹어 삼키려 기다리고 있는 걸까.


요즘 매일 실천하고 있는 작은 습관 중 하나는 ‘네이버 뉴스 안 보기’이다.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 안 보고 어찌 사냐 물을 수 있지만 나는 선택해야 했다. 사회의 각종 이야기들을 꿰고 있으면서 두려움에 웅크리고 사는 삶과 기사를 접하지 않으면서 내 할 일을 하며 사는 삶. 코로나로 힘들었던 지난 몇 년 간 충분히 신문 사회면을 꿰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전자를 선택한 2020년이 생각만큼 지혜롭거나 행복하지 않았기에 이번엔 후자를 택해 살아보려고 한다. 그렇게 마음먹은 지 일 년 정도 지났다. 효과는 생각보다 괜찮았고 가끔 보이는 기사들은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않았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의 정보는 알아야겠으나 아직까지 내면이 유약한 나는 조금 더 일상에서 침잠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뉴스에 나오는 삶을 살게 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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