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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가이

우리만의 위키백과

by 담청 Nov 28. 2024

  케이블가이라 함은, 케이블 관련 설치공을 일컫는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집에서는 TV를 무척 꼼꼼하게 봐온 남편을 뜻한다. 동생과 아주 어릴 적 보던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남편이 은근슬쩍 끼어들어 말을 섞는다.      


  “그거 주인공이 누구였고 91년도에 방영했던 거 맞지?”      


  그럼 나와 동생은 작게 감탄한다. 아니 어떻게 몇 개의 단어만 듣고 조합해서 그걸 기억해 낼 수가 있지? 주인공 정도는 알 수 있지만 방영 연도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이 남자, 여러 면에서 대단하다!     


  그가 두각을 드러내는 건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괜히 ‘케이블가이’라 불리겠는가. 노래 한 구절만 나와도 해당 가수의 데뷔년도부터 대표곡까지 줄줄 꿰고 읊는다. 그런 정보가 가득 담길만한 저장공간이 대체 뇌의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같이 살면서도 자주 놀랍다.      


  정보통의 대부분은 본인의 시각과 청각이었다. 어릴 적부터 TV를 많이 시청한 덕분이라고 했다.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일찌감치 TV 앞에서 거북목이 되어본 소녀로서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연예계 쪽의 정보를 꽤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남편이 ‘다양성’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면 나는 ‘정확성’에서만큼은 남편보다 더 나은 정보를 가졌다는 믿음이 올곧다. 그야… 내가 남편보다 더 어리니까. 두뇌가 어린 만큼 정확성이 보장되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 (대체 어디가 옳은 정보이며 정확하다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실제로 의견이 부딪힐 때가 있다. TV에서 예전에 방영했던 시트콤의 한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다. 남편은 늘 그렇듯이 “저건 주인공이 누구누구였는데 저게 몇 년도였더라…”하며 본인의 두뇌를 빠르게 스캔하며 케이블가이의 진면모를 드러내려 한 순간이, 방영 연도가 문제였다. 남편은 2002년이라고 했으며 나는 2001년이라고 주장했다.      


  남편 : 저건 분명 월드컵 하던 때에 방영한 거야. 내가 기억해

  나 : 아냐, 2002년이면 내가 고3이었거든. 그 징글징글한 기억이 어떻게 조작되겠어. 2001년이야

  남편 : 에이, 아니지. 저거 남자 주인공이 OST도 내고 인기였던 게 기억나는데?‘

  나 : 아니라니까. 고3이 시트콤을 볼 여유가 어딨어, 내용이 다 기억나는 거 보니까 2001년이 맞네!      


  아니다, 2002년이다, 아니다, 2001년이다, 아니다 저건 2002년임에 분명하다… 이를 지켜보는 동생은 두 케이블휴먼의 신명 나는 승부에 입을 떡 벌리고 바라만 본다. ‘저 TV에 미친것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혼수로 TV를 구입하지 않았다. TV가 있다면 모든 생활은 중지되고 오로지 화면만 볼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몇 해 뒤에 또 다른 리틀 케이블가이들이 탄생했겠지.      


  그의 다양성과 나의 정확성이 함께하면 어떤 위키백과의 정보도 두렵지 않았다. TV 없이도 우리는 TV 이야기를 한껏 떠들어댈 수 있었다. 두 케이블휴먼은 오늘도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방대한 양의 프로그램 정보나 노래하는 가수의 연대기를 조목조목 따져가며 목적도 없고 쓸모도 없는 나열을 한다.      


  하지만 그는 내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온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에겐 나의 헤어스타일보다 1991년에 방영한 드라마가 더욱 획기적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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