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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말하기

말보다 글, 글보다 나

by 김지현

학생이었던 시절, 스스로가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일단 친구를 사귀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혹시 내가 말을 재미있게 하니 그런 것 아닐까? 실제로 그 당시 나와 친한 친구들은 내가 말을 하면 곧잘 웃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재미있음’에 반응하는 유일한 징표라 여겼다. 이를 스스로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친구들을 말로 웃겨주려고 조금씩 애썼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가끔씩 무리수를 던지게 만들었다.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님에도 나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내 보고자 무리하게 웃기려 들었다.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타깃으로 유-우머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친구는 본인의 울타리를 자꾸 툭툭 치는 내 모습에 불편감을 드러내었다. 다행히 이성을 잃지 않았던 나는 금세 했던 발언을 철수하고 입을 곧 다물었다.

대학생이 되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주제가 벌판처럼 넓어졌다. 원하는 친구들과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대화를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았다. 어른이 획득하게 되는 자유 중에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되는구나. 물론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무서운 사실을 미세하게 느끼던 20대 초반이었다. 내가 또래보다 말발이 좋다고 느껴졌다. 특히 오고 가는 대화 중에 필요한 단어를 올곧은 타이밍에 캐치해 내어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그 있잖아. 00할 때 느끼는 감정 말이야”라는 대화가 나왔다면, 이때 상대가 말하고 싶어 하는 단어가 무엇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공허감 말하는 거야?” “그래! 맞아! 그거야.” 덕분에 처음 본 사람들과도 끊기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누군가를 웃길 수 있다는 사실은 자존감의 일정 부분을 채워주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히 재미만 있는 대화는 겉돌기만 할 뿐이다. 나로 인해 친구들이 왁자하게 웃었던 건 기억나는데, 그래서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 그들이 웃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우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들을 웃게 만드는 나의 말 실력은 가운데가 쏙 빠진 도넛과 같았다.


그렇게 직장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웃고 떠들던 친구들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나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만나야 만 하는 ‘직장동료’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체했다. 동료들 앞에서는 말을 더욱 조심해야 한다. 재미있자고 한 말이 나에게 화살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화살은 나의 직무를 멋대로 평가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어린 날들의 선을 타는 유-우머는 척추뼈 어느 매쯤으로 잘 접어 넣어두고 밋밋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말을 많이 하고 싶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청자의 역할을 도맡아 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기회도 어릴 때처럼 많지가 않다. 짧은 시간 내에 내가 하고픈 말도 해야 하고, 그 안에 그들을 웃기고 싶다는 욕망도 잘 궁굴려 적당히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대체로 웃기지는 못했다. 다행히 ‘적확한 단어 찾기’ 실력은 청자의 입장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그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뱉어내지 못한 말들이 명치까지 쌓여 한숨으로 토해져 나왔다. 말하는 능력이 점점 퇴화하는 것 같았다.


안으로 겹겹이 쌓인 말들은 결국 글로 쏟아져 나왔다. 활자로 쓰인 나의 말은 적나라하게 눈으로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수정할 수 있다. 덮어 두었다가 다음 날 읽어보면 더 매끄럽게 고칠 부분이 생겨났다. 나 혼자 써 내려가는 글은 누군가를 재미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은 남이 읽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나였다. 나는 내가 쓴 글이 언제나 재미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일이 말처럼 고민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내가 나를 웃기고 또 감탄하게 만들었다. 말하는 능력이 아주 좋은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글 쓰는 능력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남을 재미있게 해주고 싶은 욕망을 다듬어 단전으로 깊이 내려보낸 뒤, 남몰래 글을 쓴다. 몰래 숨어서 읽을 글을 쓰고 있지만 ‘나를 재미있게 해주고 싶은 능력’만큼은 모든 것을 통틀어 더욱 탁월해서 언제든 지겹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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