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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조리용 쿠키

설탕과 밀가루탕과 밀가루

by 담청 Mar 24. 2025

  둘째는 딸이었다. 막 태어난 아이는 초음파에서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양수에 절은 듯 퉁퉁 불어있었고 온통 빨갰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아비규환이어서 출산 과정 자체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엔 또렷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도통 누구를 닮았는지 모를 아이를 안았다. 동시에 물컹하고 텅 빈 배를 느낀다. 병원에서 가장 먼저 미역국 한 사발이 제공되었지만 제일 먹고 싶은 것은 보근 보근하고 달콤한 쿠키였다.

  조리원에서 우울했던 일주일을 보내고 아직 원숭이 티를 벗지 못한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회사로 출근하고 첫째도 어린이집으로 등원한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둘째와 나만의 시간이다. 미리 대여해 둔 아기침대에 둘째를 눕히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딸의 두 볼은 보송보송하다. 옆에서 바라보니 언뜻 복숭아 솜털 같은 것도 얼굴에 붙어있었다. 어떤 화장품도 바르지 않았지만 스며 나오는 아기 특유의 달달한 냄새에 정신이 아찔했다. 이 냄새는 앞으로 최소 3년간 내 발목을 잡을 것이다. 나는 조그만 아이에 매여 나의 많은 욕구를 참아내야 한다. 마음이 비릿해진다.

  귀여운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엄마가 또 있을까? 갑자기 찾아오는 죄책감에 도망가고 싶어진다. 이 못난 마음을 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매일 오후 2시의 쿠키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2시가 되면 아이는 규칙적으로 잠들었다. 밤새 보채며 깨어 울더니 숙면하는 데엔 이 시간이 최선이라 생각했나 보다.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면 조용히 냉장고에서 밀가루와 설탕을 꺼낸다. 전자저울과 쿠키 틀은 아주 조심히 가져오지 않으면 금방 덜그럭 대어 머리털이 쭈뼛 서게 만든다. 모든 재료와 기구를 식탁에 아주 정성스레 모아 펼쳐놓는다. 오늘은 버터 쿠키를 만들어야지. 미리 상온에 꺼내둔 버터를 펼쳐 으깨고 뭉갠다. 이다음 과정에서 늘 깜짝 놀란다. 버터와 밀가루를 합한 양만큼 들어가는 설탕. 내게 익숙한 단맛을 내기 위해 상당한 양의 설탕을 넣어야 한다. 전자저울 위에 쏟아 내리는 설탕 폭포를 보면서 감탄했다. 오늘의 달달함을 너에게 부탁한다. 내 못난 마음은 너의 뒤로 감춰 둘 거야.

  아이가 깰 까봐 반죽 기계를 돌릴 수 없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손목과 알뜰 주걱으로 반죽을 열심히 치대어 휘돌린다. 생각보다 잘 섞이지 않아 짜증이 난다. 무얼 떠올리면 수월해질까. 분만실에서 둘째를 낳던 때를 떠올리자니 주걱을 보울에 내리꽂아 깨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안 되겠다. 더 말랑한 상상을 해야지. 봄날에 남편과 자전거를 타던 때를 간신히 생각해 냈다. 버터와 설탕이 뭉개어져 하나가 된다. 이것만 찍어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여기에 나머지 재료를 쏟아붓는다. 머릿속에 자전거를 타던 나와 남편은 사라지고 없다. 대신 어서 섞어야 한다는 조급함만이 남아 아픈 손목을 거칠게 휘둘렀다. 한 덩어리로 만들어 둔 것을 잠시 냉동실에 휴지 시킨다. 시간이 없다. 굽기도 전에 아이가 깨면 안 되니 최소한의 시간만 허락한다. 아이의 고개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꿈에서 엄마 젖을 빨고 있는지 조그만 입을 오물거린다.

  다급하게 반죽을 꺼내어 적당한 크기로 썰고 오븐 팬에 정렬해 놓는다. 어느 요리책을 보아도 쿠키는 대부분 180도에 구우라고 하지만 시간이 없는 나는 냅다 200도에 맞춰버린다. 내가 만든 쿠키의 색이 유난히 어두운 이유가 밝혀졌다. 오븐이 돌아가는 소리는 굉장히 시끄러워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아이에게 뛰어가 가슴팍을 살포시 눌러 진정시킨다. 

  완성된 버터 쿠키는 바로 먹으면 눅눅해서 실망스럽다. 마치 내 맘대로 안 되는 육아를 보는 것 같다. 그러므로 반드시 망 위에서 한 김 식혀두었다가 맛을 보아야 한다. 바삭하게 부서지는 쿠키는 생각만큼 달지 않았다. 아까 그렇게 설탕을 쏟아부었는데 더 넣었어야 했나 보다. 쿠키를 두 개쯤 먹을 무렵 아이가 잠에서 깨 보채기 시작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에게서는 바르지도 않은 분 냄새가 났다. 쿠키와 아이 냄새가 섞여 집안은 온통 달짝 지근해 어지럽다. 그렇게 스스로 최면에 빠트려 다가올 고난을 잠시 회피해 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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