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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5

체육 수업

by 김지현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은 출근할 때부터 묘한 감정으로 범벅이 된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업, 그리고 교사인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업. 물론 아이들이 '그나마' 좋아하는 수업이라는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수업은 체육 말고도 또 있다. 옷을 갈아입기 귀찮아 아예 트레이닝 복으로 출근한 지도 오래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몇 년째 어떤 학년이건 1반을 배정받은 덕분에 몇 년째 체육 수업은 1교시가 되었다. 학급 수보다 운동장과 강당 수가 적으니 별 수 없다.


아이들에게 체육은 단순 교과 수업이 아니다. 사실 이것은 정규 교과서와 이론 수업이 버젓이 존재하는 과목이다. 하지만 교과서를 폈다간 아이들은 눈빛으로 나를 능지처참하려 들 것이다. 그래도 그 눈빛을 꾹 참아내야 한다. 수업은 기세란 말이다. 기세 좋게 40개의 버거운 눈빛을 이겨내어 체육 교과서를 펴낸다. 알아, 알았어. 곧 운동장 나갈 거야. 그전에 우리 이론과 규칙은 익히고 나가야지 않겠니, 이 배은망덕한 아이들아?


'술래잡기~고무줄놀이~'노래에 들어있는 그 '술래잡기'는 3학년 체육교과서에 무려 '태그형 게임'이란 이름으로 때깔도 좋게 수록되어 있었다. 들떠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스읍!’하는 방울뱀 소리로 눌러내고 이 운동에 쓰이는 민첩성과 유연성을 사자와 얼룩말로 빗대어 설명한다. 물론 나의 도입부 설명을 듣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업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나는 오늘 무작정 뛰지만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운동장을 나가자마자 아이들은 좀비 떼로 변신했다. 누군가가 너희들을 속박해 왔니, 아니면 며칠 감금되어 있었니? 내향형 선생님은 알 수가 없구나. 오늘 준비한 '태그형 게임'은 '화산이 폭발했다'라는 이름의 변형 술래잡기이다. 그냥 그런 게 있다. 초등학교 놀이 수업의 세계는 이렇게나 오묘하고 복잡하며 유치한 것이다. 얼음땡 같은 단순한 술래잡기 하나로는 40분의 수업을 이끌어갈 수가 없다. 다양한 게임과 활동을 준비해 변화를 도모한다. 유치함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나는 최선을 다해 "화산이 폭발했드아아아아아!" 소리치고 아이들은 순식간에 원시인이 되어 분출되는 용암과 공룡으로 분한 술래들을 피해 뛰어다닌다. 여기에 방향 전환의 지도를 잊지 않는다.


그렇게 한 시간의 체육 수업을 마치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지쳐있다. 큰일 났다. 이제 1교시가 끝났을 뿐인데. 하지만 원래 참여하는 입장보다 준비하는 입장이 더 힘든 법. 생수를 따서 꼴깍꼴깍 마시며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 그런데 이럴 수가. 수학이다. 다 재우게 생겼다. 망했다.


고학년의 체육 수업은 더욱 난감하다. 교과 내용 자체도 세분화되어있으며 일단 어렵다. 몇 년 전엔 배구와 족구를 지도해야 했다. 어릴 적 우유 팩 차기도 몇 번 안 해본 내가 족구를 가르쳐야 하다니, 서브만으로 상대편의 점수를 올려주던 내가 배구를 알려줘야 하다니. 운동에 소질이 없는 나를 만난 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대체 대학 시절, 어떻게 그 많은 체육 시험을 통과했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열심히 유튜브 영상을 참조하여 이론이라도 잘 가르쳐보려 애쓴다. 다행히도 고학년엔 나보다 기능이 좋은 친구들이 여럿 있으므로 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수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싶지 않아 마흔이 넘었지만 사력을 다해 뛰어본다. 물론 뛰고 나면 그날 저녁밥은 도저히 차릴 기운이 없어 대체로 라면이다.


가장 힘들었던 체육 수업은 ‘씨름’ 수업이다. 어... 그러니까 이게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고요. 교사들은 이걸 지도해야 한답니다. 교재 연구실엔 청색과 홍색 샅바가 각각 한 박스씩 준비되어 있었다. 교과서를 몇 장 더 넘겨보니 안다리, 밭다리에 들배지기까지 나와 있었다. 맙소사. 아주 어린 시절 명절날, 할아버지가 TV로 보던 씨름대회가 스쳐 지나갔다. 화면 속 그들은 분명 반 나체상태였는데? 당연히 그렇게 지도하라는 건 아니었다. 일단 본격적인 씨름 기술에 들어가기 앞서 샅바와의 씨름을 지속해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본 샅바. 다 펼치니 아기들 천 기저귀보다 훨씬 길었다. 교사용 지도서엔 샅바를 순서대로 매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지면으로 이해될 리가 있나. 급하게 유튜브 동영상을 뒤져본다. 다행히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교사들을 위한 영상이 꽤 등장했다. 모두가 퇴근하고 불 꺼진 어두운 학교에서, 중년의 여교사는 사타구니 사이에 샅바를 걸치고서 이 매듭을 보내는 곳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헷갈려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를 보고 따라서 샅바를 맬 아이들을 위해 나는 반대 방향으로 배워야 했다. 이젠 밥 먹는 손이 어느 손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영상 속의 선생님은 멋지게 샅바를 완성했는데 왜 거울 속 나는 빨간색 천 기저귀를 차고 있는가.


수업 날이 되어 개인별로 샅바를 나누어 주고 영상을 느린 배속으로 함께 시청했다. 물론 봐도 봐도 모르겠다며 아우성친다. 그 맘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걱정 마.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 앞에서 차근차근 샅바 매는 것을 보여줄게!


... 그리고 나는 기억을 잃었다. 한 시간의 체육 수업이 어떻게 끝났는지 잘 모르겠다. 쉬는 시간이 되자 샅바 매기를 완성한 친구들이 절반, 다시 풀어 시도하려는 학생들과 샅바 위에 누워 아 몰랑 하고 있는 학생들이 절반이었다. 어렵게 준비한 샅바 매기 수업은 이렇게 저무는구나. 초등 수업이 어린 날 여러 가지를 맛보는 것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찍먹 할 일인가. 앞으로 창창하게 남은 안다리, 밭다리, 들배지기 수업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의원면직 하면서 일단 호루라기부터 처리했다. 한참을 입으로 불어내는 것을 사용했다. 내 감정에 따라 소리 크기를 조절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위생 문제 때문에 전자 호루라기로 교체했다. 차가운 삑- 소리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먼지 묻은 호루라기를 매번 씻고 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꽤 오래 썼는지 건전지를 새로 교체했음에도 지난 3개월, 소리가 났다 안 났다 난리였던 호루라기는 깔끔히 분리수거했다. 그다음 불필요해진 것은 체육 수업 때 입었던 트레이닝 복이었다. 여름철, 간절기, 겨울철에 입는 것들이 따로 있었고 그에 맞게 실내에서 신을 운동화도 구비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이것들과 만날 일이 없어졌다. 아, 장 보러 갈 때 입으면 되지 않느냐고? 글쎄. 보기만 해도 고되었던 체육 수업이 기억나는지 지금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트레이닝 복들은 잘 개어져 옷장 서랍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운동에 소질이 없었기에 누구보다 체육 수업에 공을 들이고 열심히 준비했다. 너희들은 나처럼 손과 발의 협응력이 떨어지는 어른이 되어선 안돼! 교육과정에 있는 내용을 착실히 지도해 다음 학년으로 올려 보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다친 적도 많았고, 깨진 돈 또한 많았다. 그러나 어떤 직업이 40대에 샅바를 매어 보는 경험을, 숨이 차게 헐떡거리며 달려보는 경험을 주겠는가.


앞으론 1교시 체육 수업을 준비하려 아침에 미리 트레이닝 복을 입을 필요도 없고, 호루라기 목걸이를 걸 일도 없다. 아이들 앞에서 뛸 일도, 공을 붙잡고 시범 보일 일도 없다. 1교시가 한참인 시간에 산책로를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걸어가는 나를 보니 이제야 정말 40대에 들어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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