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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0

교재 연구가 나를 삼킬 때

by 김지현

마지막으로 근무하게 된 학교는 교생 실습 학교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네이버 지도만 펼쳐 놓고 ‘어디가 집에서 제일 가까운가’ 순으로 근무지를 골랐다. 이게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 나는 미처 몰랐다. 1 지망 학교에서 미끄러져 결국 이곳으로 배정받게 되면서 실습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교생 실습 기간이 1년에 3번이나 되다니,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하지만 그런 학교에 내 손으로 지망한 것을 어쩌랴. 분명 여기에서 뭐라도 배워가는 게 있겠거니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낫다. 그렇게 아주 튼실한 정신으로 2년 동안 11명의 교생 선생님을 만나왔다.


해마다 맞이하는 첫 번째 교생 실습은 교대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장 장기간의 실습이었다. 4주 동안 진행되었고 교생 한 명당 3번의 수업을 해야 한다. 작년 첫 실습 기간, 우리 반에 배정된 교생 선생님은 두 분이니 나는 총 6개의 수업 안을 머리 싸매고 지도해야 했다. 게다가 제비 뽑기에마저 운이 없었던 탓에 우리 반 교생 선생님은 다들 꺼려하는 대표 공개 수업까지 맡게 되었다. 그 말은, 지도교사인 내가 조져진다는 소리였다.(지도교사는 총괄 지도를 한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내 머릿속엔 이 생각으로 가득했다.


‘시간이 없어. 4주 동안의 교재 연구를 미리 해 두어야지!’


미리 준비한 수업을 하는 성향의 교사인 나는 최소한 2일 뒤의 내용을 계획하곤 했다. 수업 전날에 다음날 것 하나만 쏙 준비하는, 촉박함을 부르는 행동은 내 인생에 없다! 적어도 준비물 등을 학생들에게 공지할 여유 시간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교재 연구란 연재 만화가들의 세이브 원고와도 같은 것이다. 미리 몇 편을 그려놓지 않으면 소재 기근에 시달려 아무거나 그려버려 스토리가 산으로 가게 된다. 수업도 마찬가지. 여유 있게 준비해 두지 않으면 허둥대다 학습 목표와 상관없는 수업을 해버리곤 한다. 그 당황함과 절망스러움이 너무나 싫었다.


수업을 준비할 때 생기는 특유의 여유로움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사람은 돈에만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더라. 결국 나는 여유에마저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하루하루 교재 연구를 미리 하는 날이 늘어만 갔고, 결국 이틀 뒤의 교재 연구를 하던 성향은 일주일 뒤의 것까지 해버리는 것으로 늘어나 버렸다. 월요일 오후가 되면 다음 주 월요일 것을 하는 식이다. 물론 일주일 전에 해놓은 교재 연구가 생각날 리 만무하니 수업 전날 다시 훑어보는 건 필수적인 작업이다.


여기까지만 하면 그저 계획적인 교사로 남을 수 있지만 마음은 항상 나보다 앞서간다. 이번엔 오후 시간이 아니라 아침 출근 시간마저 교재 연구를 하려 날뛰는 나를 보게 되었다. 출근이 빠른 나는 아이들이 오기 전 한 시간가량의 여유가 있다. 이때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시며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하곤 한다. 하지만 ‘미리미리’의 마음은 이 시간마저 욕심껏 교재 연구에 써버리고 마는 것이다. 때론 아이들이 등교하는 순간까지도 다음 주 교과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막 태어난 듯한 아이들의 말간 눈동자를 바라보는 기회도 박탈당한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오후가 되면 늘 후회했다. 아침에 다음 주 교과서를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눈을 더 바라볼걸. 노래 하나를 더 듣고 쉴걸. 커피 한 모금을 느긋하게 마셔둘걸. 그렇다고 또 그렇게 벌어놓은 오후 시간을 값지게 사용하는 것도 아니면서 후회는 후회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찾아온 ‘4주의 수업을 미리 준비해 버려!’라는 생각은 환희와도 같았다. 그래, 교생실습 주간엔 교생 선생님들 지도를 하느라 내 수업을 준비할 여유가 없어. 그러니 완벽하게 미리 해 버리는 거야! 위험한 불꽃이 마음에서 일렁였다. 이윽고 미친 듯이 계획을 세웠다. 월요일엔 이틀 치 교재 연구를 하고 화요일엔 이만큼의 준비를 하며... 이제 오늘부터 ‘다가올 4주 동안의 실습’을 위한 지나친 미리미리 준비가 시작될 참이었다. 마음먹은 김에 당장 시작하기로 했다. 수학 교과서부터 펴서 이틀 치의 분량을 훑었다. 빠르게 보며 동기유발을 생각하다 보니 내 안의 창의력은 싹수부터 노랗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미리, 먼저, 많은 양을, 빨리 생각해 내려 용을 쓰면 신선한 아이디어는 결국 바닥이 드러나 먼지를 일으킨다. 그때부터는 단지 40분의 시간을 때울 내용만을 찾게 된다. 그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이미 시작된 수업 준비를 멈추는 방법을 몰랐다.


하루가 저물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기울어가는 해를 보며 불현듯 나의 ‘지금’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해졌다. 일주일 뒤를 준비하고, 2주 뒤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미리미리 준비한다고, 여유를 벌어놓았다고 좋아했지만 정작 준비한 것들을 들여다보니 창의적이거나 새롭지도, 의미 있거나 재밌지도 않은 내용들이 많았다. 기본적인 교과서 틀에만 충실한 수업. 이것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단시간에 많은 양의 교재 연구를 하다 보니 나 역시 하지도 않은 수업 내용에 질려버린다. 누구를 위한 교재 연구인가? 학생들의 알찬 수업 시간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나의 두려움을 막기 위한 방어막이었을까? 그리고 이것을 하는 동안 나의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결국 4주 몽땅 미리 준비하려던 계획을 접어버렸다. 미래의 마음은 어서 다시 지도서를 펼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지금을 살아내는 마음은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그저 주어진 하루를 조금은 느긋하게 살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미리미리 교재 연구’를 중단한 덕분에 교생 실습 기간 내내 수업으로 허덕였다. 다음 날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저녁 늦게까지 남아 일하던 때도 많았다. 하지만 아침 시간, 등교하는 반 아이들의 눈동자를 또렷하게 볼 수 있어 좋았고 잔잔한 음악과 함께 내려 마시는 커피 향은 감미로웠다.


사는 동안 내내 어딘가 헤매고 있을 나의 ‘지금’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사실은 언제나 내 옆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동안 애써 못 본 척 끊임없이 달리기만 했다. 앞으로, 또 앞으로. 이제 달리기를 멈추어야겠다. 날것의 아이디어가 살아 숨 쉬는, 적당한 정도의 미리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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