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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0

연필깎이는 나누고 마음은 챙기고

by 김지현

9월에 중간 발령을 받았던 나는 교감으로 승진한 선생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들어갔다. 초임 교사에게 주어지는 것은 교실 외에 아무것도 없다. 스테이플러조차도 없다면 사비로 구입해야 한다. (요즘은 행정실에 구비되어 있다고 들었다.) 친구들과 달리 나에겐 교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서랍을 열어보니 스테이플러는 3개나 굴러다녔다. 스카치테이프 커터기부터 시작하여 채점용 빨간 색연필, 갖가지 분필 끼우개, 각종 풀과 색연필 세트까지. 그리고, 동시에 나에겐 불필요한 많은 것도 있었다. 이 교실을 사용하시던 선생님은 승진하시며 정말 몸만 빠져나간 것이다. 나와 하등 관련 없는 클리어 파일들과 3공 파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게다가 식물 계의 저승사자인 나를 반기는 무지막지한 화분들이라니...


뭐 짐은 좀 많지만 돈 한 푼 안 들이고 사무용품을 받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다. 필요한 것들이 손에 닿는 곳에 모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땐 몰랐다. 이 모든 짐들은 학년이 마무리되면 바로 내가, 나 혼자, 오로지 나 자신이 치워야 한다는 것을! 결국 종업식 날이 지나서도 나의 짐 치우기는 끝날 줄 몰랐다. 치우고 치워도 끝없이 쏟아지는 예전 선생님의 학급 파일들... 나는 꼭 내가 쓴 교실은 반드시 깔끔히 정리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16년 6개월이 지나가는 요즘, 이제 내가 사용한 마지막 교실을 정리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어차피 다음에 갈 학교도 없거니와 불필요한 짐들은 버리고 나누면 되었기에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종업식 날, 쓸만한 물건은 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간의 교직 생활을 늘 나와 함께한 은색의 기차 모양 연필깎이(진짜 이렇게 튼튼한 연필깎이는 시중에 없다!), 12색 색연필과 사인펜 세트, 마카 세트, 유성매직 세트, 내년에 쓰려고 미리 구입해 둔 하트 모양 포스트잇, 여분으로 두었던 클리어 파일들 등 사용 가능한 문구 관련 용품은 필요한 아이들에게 골고루 배부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선물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너희는 내 마지막 학생들이야. 너희들과 함께 한 올해가 가장 안정적이었어. 이제야 막 학급 경영의 기틀을 다진 것 같은데 선생님은 떠나게 되었네.


-선생님, 이거 진짜 저 가져가도 돼요?


물론이지. 물건을 받아 가는 아이들의 표정은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나는 너희에게 어떤 선생님이었을까. 궁금하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그 밖의 물건은 학교 선생님들께 나눔 해 드렸다. 커피 포트는 건강에 나름 신경 쓴다고 유리로 된 커다란 걸 샀던 기억이 난다. 이걸로 많은 커피를, 홍차를, 녹차를 끓여 마셨다. 이건 차를 끓일 일이 많은 복지실 선생님께서 가져가셨다. 겨울에 자주 사용하던 1인용 전기방석도, 방과 후에 땡땡 부은 종아리라도 풀어보자며 구입한 요가 매트도 여기저기에 드렸다. 모두 제 주인을 알맞게 찾아간 것 같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교실을 둘러보니 떼어내야 할 것이 천지였다. 색색깔의 작품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는 당산나무 같은 어지러운 느낌! 그게 바로 내 교실이었다. 복도 쪽 유리창에도, 벽면의 거울에도, 교실 뒤 환경판에도 아이들의 작품이며 내 꾸미기 작품이 덕지덕지 붙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한쪽은 여전히 크리스마스인데 다른 쪽은 아직도 낙엽이 지는 가을이었다. 제때 작품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게다가 교실 꾸미는 것을 즐기는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저런 장식을 만들었다. 직접 모빌을 만들어 매달거나 가랜드를 만들어 붙였다. 수업과 무관한 자석들도 그림으로 예쁘게 꾸몄으며 교실 앞문부터 뒷문까지 아기자기하게 무언가를 붙여 놓았다. 누군가 지나가면 혹시 가운데 끼인 병설유치원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 나를 원망하는 순간이 왔다. 높이도 달아놨네. 의자를 밟고 올라서도 떼어내기가 힘들어 하는 수 없이 책상을 놓고 올라갔다. 내가 천정에도 무언갈 붙이는 미친 짓을 다 했네. 다음에 이 교실을 이용할 선생님과 새로운 아이들을 위해 테이프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다.


떼어낸 것을 모아놓으니 그냥 쓰레기가 되었다. 테이프가 붙거나 접착제가 묻어 있어 분리수거도 안된다. 몽땅 종량제 봉투에 넣어야 할 판이다. 애정을 넣어 열심히 만들고 꾸미고 게시한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봉투에 담아 발로 꽉꽉 밟아야 할 쓰레기가 되는구나. 하나라도 더 집어넣으려 힘차게 구기며 생각했다. 교직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도 여기에 모두 모아 함께 버리고 싶어. 나에게 너무 소중했던 일이다. 울적하게만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교직은 나에게 ‘사람은 매일 고쳐 쓰는 것이다’를 알려준 소중한 직업이었다.


-어차피 사람은 안 변해. 그럼 이런 교육 모두 소용없는 일 아니야?


괜찮아. 변하지 않으면 매일 구겨진 나를 고치고 펼쳐서 쓰면 돼. 나는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야. 그렇게 하루만큼 달라지는 아이들과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굉장한 직업이었다. 쓰레기봉투에 내 지난 눈물과 분노와 화를 꾹꾹 눌러 담아 아주 견고하게 묶었다.


교실 뒤 환경판과 벽면이 깨끗해지자 그나마 빈 교실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치워야 할 것이 더 남았는데... 그것은 차곡차곡 사 모은 나의 ‘수업 교구’들이었다. 교직 경력이 한두 해가 아니니만큼 나에게도 각종 수업에 사용할 교구가 무척 많았다. 의도치 않았지만 올해는 특히 불필요한 교구는 모두 정리하고 그동안의 수업 때 반응이 좋았던 히트상품만 남겨놓았다. 게다가 교생 실습을 위해 준비한 독특한 교구들도 있었다. ‘평생 가지고 다니며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용했기에 흠집 하나 없이 깔끔했다. 물론 내가 올해 퇴직을 할 줄은 몰랐지. 이 아까운 교구들, 동학년 선생님들께 드리려고 둘러보니 세상에, 그분들은 나보다 더 많은 교구들을 가지고 계셔서 이미 담을 곳이 없었다. 아차차, 어차피 나에게 있는 건 남에게도 있는 교직 사회를 내가 또 잊었다.(교사들은 대부분 만물상이다!) 한참을 생각하다 같은 초등교사인 동생이 생각났다. 육아 휴직을 하면서 교구들을 모두 정리하는 바람에 쓸만한 게 없다고 했다. 동생을 교실로 불러 교구 하나하나 사용법과 보관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좋은 것들을 안 쓰는 게 아깝지 않아?

전혀. 네가 용도에 맞게 잘 써주었으면 좋겠어.


모든 짐들이 빠져 책상, 걸상, 교탁 정도만 남은 빈 교실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허전한 동시에 무언가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난 과거의 그 선생님과는 달랐다. 내 교실을 쓰는 다음 선생님께 깨끗한 빈 교실을 드렸고, 동생에겐 꼭 필요한 교구들을 선물로 주었다. 모두가, 서로 다른 곳에서 행복한 선생님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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