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시작의 날
8시 30분. 집 근처 중학교에서 등교를 독려하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아, 평일 이 시간에는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학교 방송 주제에 너무 아련한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듣다 보니 자꾸 무언가가 잡힐 듯 말 듯 아련해졌다.
방금 전, 아이들은 모두 등교했다. 이제 이 집엔 나와 고양이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고양이에게도 하루의 루틴이 있다는데 이제 너도 나와 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거야. 물그릇을 갈아주며 생각했다.
이 시간엔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1교시가 시작되기 전 30분, 매번 하는 수업인데도 늘 긴장되었다. 1교시를 잘 시작해야 하루가 순조롭다는 스스로의 믿음이 있다. 반 아이들 역시 이불속 ‘학교 가기 싫어’와 책상 앞 ‘결국 학교는 가야 해’ 두 가지 생각의 대결로 벌써부터 정신적으로 소진된 상태다. 아침밥도 먹지 못한 아이, 미처 오늘의 준비물을 챙기지 못한 아이, 여전히 옆자리 짝꿍이 싫은 아이. 밝은 표정의 아이를 찾아보지만 일단 교탁 앞의 나부터가 바짝 얼어있었다. 교직을 천직이라 생각하기로 했으면서, 여기에 순응하기로 했으면서 왜 이렇게 힘겨울까. 내 안에서도 소명 의식과 본능적인 욕구가 싸우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아이들에게 사랑의 에너지를 전해 줄 거야. 아니야, 나에겐 전해줄 에너지가 이미 바닥났는 걸.
그런 생각을 하며 손에 빨랫감을 쥐었다.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수건들을 긁어모아 아주 정성껏 접었다. 손바닥으로 찹찹 주름을 펴고 접힐 곳을 손날로 눌러 정갈하게 개었다. 늘 마음속에 한가득 들어차있던 단어는 ‘빨리빨리’였다. 무엇을 해도 급했다. 빨래도 급히 정리해서 다음 집안일로 넘어가야 했다. 요리도, 설거지도, 교재 연구도, 공문 처리도 모두 빨리빨리. 그렇게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한 덕분에 한 줌 여유 시간이 생기면 이걸 어쩌지 못해 벌벌 떨었다. 쥐어 짜낸 나만의 시간인데도 무엇인가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자기 계발 영상이라도 보던지, 책이라도 읽던지. 하다못해 ‘계획을 위한 계획’이라도 짜야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맘 편히 쉬라고 하늘에서 하루에 10시간을 더 내려주었어도 쉬는 법을 몰라 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느린 속도로 수건을 개어 쌓고 있었다. 지금 쯤이면 1교시가 시작되었겠지. 16년 6개월 동안 나의 1교시는 주로 체육과 국어였다. 체육은 강당과 운동장 사용 시간 때문에 학교 측에서 배정해 주어 어쩔 수 없었다. 국어는 뭐랄까... 하루의 시작으로 쓰임이 만만한 과목이라 생각했다. 힘없고 기운 빠진 아이들과 함께 1교시부터 마라카스를 흔들며 음악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아마 끝내주는 동기유발 자료를 제시하며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하겠지. 이어서 학습 목표를 적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며 교과서 내용으로 들어갈 거야. 순식간에 한 차시 분량의 국어 수업이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 정갈하게 쌓여있는 수건들을 수납장으로 옮기며 이제 수업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
하지만 상당 시간을 교직에서 보낸 탓에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에 맞춘 삶이었다. 초등학교 한 차시 수업은 40분, 그리고 쉬는 시간은 10분이다. 나의 생체시계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시간표에 맞게 설정되어 있었다. 방학 중, 집에 머물더라도 시계를 보면 ‘음. 지금은 2교시가 마무리될 시간이군.’, ‘지금쯤이면 점심 식사를 하고 있겠는데?’ 학교의 일정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학교에 있지 않았지만 정해진 수업 시간이면 몸은 저절로 경직되었고 허리가 바르게 펴졌다. 10분씩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에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몸은 시스템화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의 하루는 학교의 시간표가 지탱해주고 있었다.
의원면직을 결심한 이후로 늘 이날의 내 기분이 궁금했다. 모두가 학교에 가는 3월 첫 등교일, 홀로 집에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하필 선택한 직업이 교직이라 8살 이후로 3월 첫 등교일을 맞지 않은 해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내게 주어진 여유 있는 3월의 오늘. 기대했던 것만큼 기분이 좋진 않았다. 날아갈 것 같지도, 춤을 출 만큼 신나지도 않았다. 정형화되어있는 인생의 커다란 축 하나가 빠져버린 느낌은 대단한 것이었다.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교대에 합격한 후의 어느 날, 집 근처 튀김집에서 튀김을 사던 일이 생각났다.
-아유, 학생은 몇 살이야?
-아, 저 올해 수능 봐서 곧 대학에 가요.
-아이고, 그래. 대학 합격은 했어?
-네.
-무슨 대학 갔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 교육대학교 합격했어요.
-진짜? 아이고, 효도했네, 효도했어! 이제 선생님 될 일만 남았네!‘
튀김 한 봉지를 건네주시며 주인아주머니는 정말 장하다고, 잘했다고, 앞길이 활짝 폈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가고 싶지 않은 대학이었다. 다른 직업은 다 해도 교사만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아주 열심히 임했고 천직이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게 되고 말았다. 교대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튀김집 아주머니만은 아주 오랫동안 생각이 났다. 아주머니, 저 이제 앞길이 고생길이네요. 어떡하죠?
그래도 의원면직 후 꼭 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천천히, 느긋하게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 커피를 잘 마시지 않던 나는 학교에서 커피를 배웠다. 이렇게 쓰디쓴 커피를 사람들은 왜 마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의 쓴맛 대부분을 교직에서 깨친 나는 커피의 맛은 그에 비해 결코 쓴 게 아니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힘든 날엔 하루에 다섯 잔도 벌컥벌컥 마셨다. 나에겐 수액과 마찬가지인 생명수였다. 그마저도 여유 있게 마시지 못했다. 얼른 물 끓이고 후다닥 드립백에 쏟아부은 뒤 급하게 식혀 콸콸 마셔댔다. 이제 커피맛보다 쓴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커피포트에 물을 담아 올렸다.
들으려고 했지만 방학 때 듣겠다 미루어 두었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마뜩지 않은 상념도 드립백에서 또옥 똑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할까. 할 줄 아는 건 아이들 가르치는 일뿐이다. 사회는 과연 이런 나를 쓸모로 할까. 스스로를 도구로 평가하려는 마음을 커피 한 모금이 간신히 내려주었다. 모르겠어. 바닥까지 모든 걸 다 써버렸거든. 지금은 그냥 누워 있을래. 커피를 다 마시고 나는 이불속에 다시 들어갔다.
12시 20분. 4교시가 끝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