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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회복일지

by 김지현

오전의 중요한 일정은 ‘헬스장 가기’였지만 그것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오늘은 아침부터 정갈하게 씻고 가꾸었다. 청바지며 깔끔한 셔츠를 차려입고 내가 간 곳은 집 근처의 카페. 가방 안엔 일기장과 펜을 담았다. 늘 마시던 따뜻한 카페 라떼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언젠가부터 달달한 커피는 입에 대지 못했다. 한 모금 삼키는 것만으로도 식도부터 지방이 끼는 듯한 느낌이 들어 끔찍했다. 그래서 늘 카페에 가면 아메리카노 또는 달지 않은 라떼만 주문했다. 오늘도 그랬다. ‘카페 라떼 따뜻한 거 톨 사이즈 하나요’ 나는 언제쯤 캐러멜 마끼아또를 행복하게 마실 수 있을까.


갓 나온 커피를 받아 들고 카페가 한눈에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헬스장 대신 이곳에서 나를 위한 일을 해보려 한다. 나와 음식의 관계를 돌아봐야지. 이것을 위해 ‘회복일지’를 작성하려 한다. 회복일지에 어떤 항목이 들어가면 좋을지 고민해 볼 것이다.


그동안 내가 작성해 온 것들은 각종 투두 리스트, 체크 리스트, 타임 트래커 형식의 플래너 들이었다. 그저 오늘의 내가 해내야 할 일, 내일의 나에게 떠맡길 일들을 한가득 적어놓은, 글자로 가득한 종이. 그 목록엔 ‘해야 할 일’만이 가득할 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없었다. 아침부터 일어나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해야 할 갖가지 의무들이 나열되어 숨통을 조이고 있었지만 그것이 부지런한 삶이라 생각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미라클 모닝. 직무와 관련된 쉼 없는 학습, 영어 공부와 독서, 시간을 쪼개어 운동, 끝없는 자기 계발... 생산성 있는 삶이라는 이름 아래 나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듣지 않기 시작했다. 얼마나 피곤한지, 얼마나 쉬고 싶은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만 했고, 가성비 좋은 삶을 살아야만 했다. 세상이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지 않는가. 지금의 나는 부족하다고. 그래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플래너에 체크를 표시했고... 쌓여가는 스트레스는 폭식과 구토로 풀었던 모양이다.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방법은 아니기에.


오늘은 기존의 플래너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회복일지를 만들어보겠노라 다짐했다. 생산성 있는 삶을 좇았더니 스트레스만 대량 생산했다. 이젠 나를 좀 더 들여다보는 ‘쓸데없는’ 항목들을 만들어야지.


회복일지의 기본은 음식과의 관계이기에 일단 먹은 것의 내용을 적는다. 몇 칸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간헐적 단식을 한다며 저녁, 또는 아침 식사를 건너뛰기 일쑤였다. 이제 다이어트를 하지 않기로 했으니 세끼를 꼬박꼬박 잘 챙기려 마음먹었다. 그러고도 허기가 지거든 간식도 먹어버리겠다! 그렇게 4개의 칸이 생겼다. 나는 오늘부터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끼니를 챙길 것이다.


먹은 것뿐 아니라 식사를 하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는 점심을 물처럼 마셨고 집에서도 아이들을 돌보며 먹느라 한가하게 먹기 힘들었다. 이제는 5가지의 규칙을 정해 좀 더 ‘인간답게’ 먹어보고 싶어졌다.


첫째, 먹기 전 음식의 냄새를 맡으며 즐기기.

둘째, 많이 씹지 않아도 좋으니 천천히 먹기.

셋째, 한 입 한 입 맛을 느끼기.

넷째, 한 입을 입에 넣고 씹는 동안 숟가락을 놓기,

다섯째, 식사를 마친 후 배를 통통 두드리며 ‘잘 먹었다’ 외치기.


힘든 일도, 시간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이 쉬운 걸 여태 못하고 넘어갔다는 것은 역시 이상하다. 하지만 이걸 이렇게까지 체크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도 조금 기괴했다.


다 먹고 나면 포만감도 체크한다. 보통 다이어트 식사 일기에서는 3단계로 분류하지만 나의 회복일지는 4단계로 분류했다. 조금 부족함, 적당함, 조금 과함, 불편함. 이 단계들은 단지 문서상의 분류가 아닌, 과거 식사 때마다 실제로 느꼈던 느낌들이다. 물론 폭식과 구토는 ‘불편함’의 극치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오늘 아침은 다행히 ‘적당함’의 포만감을 느꼈다.


배가 얼마나 불렀는지를 알았다면 이젠 나의 감정을 꼭 챙겨야 할 때. 회복일지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이 감정에 의해 더 먹을지, 먹고 토해버릴지, 여기서 그만둘지가 좌우되기도 한다. ‘기분 좋음’부터 ‘죄책감’까지 세심하게 8가지의 감정으로 구성했다. 특히, 평소 배가 부르면 그 자체를 살이 찐다는 신호로 받아들였기에 ‘불안함’이라는 감정을 추가했다.


그밖에 가벼운 운동을 적는 칸과 하루를 마무리하며 나에게 하는 말을 적는 칸도 함께 만들었다. 헬스장은 포기했지만 이제 막 산책의 즐거움을 느끼던 차라 하루 10분의 산책도 운동으로 퉁치려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몸을 막 움직이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가 간단한 요가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이불속에서 움직이기 싫어했던 내가 스스로 움직이겠다 결심하다니, 회복일지는 어쩌면 음식을 뛰어넘어 내 삶 전체를 나아지게 해 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만들어진 일지의 항목을 둘러보았다. 과연 내가 끼니마다 잘 체크할 수 있을까. 플래너를 꾸준히 써왔기에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렇게 ‘허접스러운’ 항목에 체크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느 항목을 둘러보아도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식사 후 나의 감정을 알아서 어디에 쓸 것인가. 배는 부르면 장땡이다. 배가 터질 것 같으면 토하면 되고. 그러나 이제는 이 말도 안 되는 일지의 항목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졌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요 며칠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었다. 어젯밤 12시에도 생각나서 편의점으로 달려갈까, 하다가 꾹 참았다. 오늘 아침 6시에 일어나자마자 사 먹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얼마 전 유튜브 쇼츠에서 본 하겐다즈 영상이 머리에 박힌 모양이다. 운동한다며 단 것을 금지해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집에 갈 때 하나 사 먹지 뭐.


카페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집 근처 편의점에서 하겐다즈 초코 맛을 사 와야지. 그런데 편의점으로 들어가면서도 아이크스림이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네, 오늘 아침, 아니 방금 카페를 나오면서도 ‘맛있겠다’며 기대에 잔뜩 부풀었는데. 그냥 시원한 물 한잔이 간절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출렁이고 시원한 한잔. 머릿속 하겐다즈의 이미지는 갑자기 깨끗한 물 한 컵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편의점을 나왔다.


이상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똑같았다. 다만, 어제까지는 다이어트를 하던 나였고 오늘부터는 다이어트를 목표에서 삭제한 나다. 그것만으로도 이상식욕은 충분히 잡혔다. 그 뒤로도 나는 쭉 하겐다즈를 포함한 어떤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지 않았다. 대신에 물이 당겼다. 내가 나를 못살게 구는 동안 몸은 사막처럼 바짝 말라 있었던 것이다.


image001.jpg < 당시 카페에서 만들었던 '쓸데없는 회복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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