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린이”의 썰 3 out of 3
“드디어 북한산(둘레길)에 도전하는 날이다.”
북한산 둘레길에서 걷린이가 ‘둘레어’로 데뷔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삼각산(오래전 북한산을 부르던 이름)에는 어릴 적 아버지의 향수가 있다. 살던 집 마당에서 눈을 들면 북쪽 하늘에 인왕산 북악산 그리고 삼각산이 있었다. 국민학교 때였다. 시력이 나빴던 내게 삼각산은 보이는 거리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모양을 설명하며 가리키는 손 끝을 집중하니 멀어서 파리한 봉우리 3개가 있었다. 아버지가 알려 준 이름 삼각산.
어린 마음에 인간이 가는 곳이라 상상하지 못 했던 곳. 성인이 되어 북한산이 인기 등산 코스로 소개되는 걸 볼 때도 북한산이 삼각산인 줄 오랫동안 몰랐다.
너무 늦게 찾아와 신비로운 산봉우리는 가 볼 수 없는 체력이지만 둘레길에서나마 만나자 삼각산아!!
첫 길이라 혼자 가기가 좀 무서워 바쁜 딸을 꼬드겼는데 OK가 떨어졌다. 가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곳에 드디어 가게 된 엄마를 응원차 따라나섰을 거다. 딸도 북한산은 처음이었다. 딸과 함께라 구간 선정에 고민을 좀 했다. 1구간부터 시작하는 게 둘레어에게 올바른 태도일 것 같긴 한데 바쁜 시간을 쪼개준 딸에게 잘 보이려 무난한 길보단 와우 팩터가 있길 원했나 보다. 그래서 구름전망대에서 보는 뷰가 일품이라는 3구간 흰구름길을 첫 길로 택했다.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보며 길 공부를 했다. 3구간은 길이 4.1킬로로 난이도 중으로 소개되어 있다. 마침 유튜브 영상 2개가 4구간 끝에서 시작해 2구간을 향해 역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끝나는 지점에 좋은 식당이 있다는 정보에 혹해 따라 걷기로 했다.
아침 일찍 나섰다. 둘레길에 들어서자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이리도 가까운데 이제야 북한산엘 오다니. 구불구불 걷는 숲 길은 그동안 걸었던 산책로나 자락길과는 확실히 비교가 되었다. 오르내림이 많아 다채롭고 숲의 기운이 선명했다.
초반은 예상대로 길을 따라 잘 걸었다. 큰 암자를 지난 다음부터 생각 외로 이정표가 분명치 않았다. 없든지 못 봤든지 헷갈렸는지 갈림길에서 어김없이 길을 잘 못 들어 둘레길을 한참 벗어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있었다.
“또 잘 못 들었어!”
어처구니없어 깔깔대며 되짚어 나왔지만 돌아 나와 길을 잡으면 다음 갈림길에서 또 산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지도로도 설명이 되질 않았다. 기대를 품고 첫 구간으로 택한 이유인 전망대는 어느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반대편 산 능선에 표시되어 있었다. 산은 언제 넘은 거지. 머리가 띵했다. 숲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밖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급기야 모골이 송연해졌다. 뭐지? 깔깔대던 웃음이 사라졌다.
지치기 시작했다. 다시 되짚어 숲을 빠져나오는데 딸이 정색하고 한마디 던졌다.
“산신령을 만난 것 같아”.
(그래 오늘 산신령이 젯밥이 필요했는데 그나마 우리 모녀의 기가 쎄서 살아 나온 거 같아.)
농담처럼 받아치려다 딸이 정말 진지한 것 같아 말로 내놓진 않았다. 우리는 점을 본다거나 타로조차도 본 적 없는 인간 부류다. 그런 우리가 정말 산신령에게 불려 간 기분이었다.
어찌어찌 (좀체 헤맨 경로가 되짚어지지 않아서 어찌어찌라고 밖엔 못하겠다.) 딱 중간 지점인 화계사에 도착했는데 만보기는 이미 8킬로를 찍었다. 2킬로를 8킬로로 늘려 걷는 요술이라니.
기온도 오르고 지치고 있었다. 딸은 정말 산신령이라도 본 듯 얼굴색이 좋지 않다. 포기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화계사 일주문을 지나 지하철로 향했다. 덤불을 헤치며 산비탈을 오르내리느라 꽤 운동이 되었다고 위로하면서.
첫 북한산 둘레길 도전은 그렇게 구간 완주에 실패했다. 나중에 다시 걸어 보니 헷갈리는 길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길을 헤맸는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삼각산에 신비로움을 한 스푼 추가했다.
초보인 내겐 오래도록 간직할 겸허함도 남겼다. 산봉우리든 둘레길이든 자락길이든 겸허하게.
며칠 후 3구간에 재도전하던 날. 딸에게 빈말로라도 같이 가자고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정말 산신령을 본 표정이다. ㅎㅎ
* ‘둘레어’는 제가 마구 갖다 붙인 이름입니다. 제주에서 올레를 걸을 때 스스로 ’올레어‘라 부르며 다녔던 게 생각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