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가 나를 막더라도
살다 보니 알게 된 게 있다. 누구의 잘못인지 중요하지 않을 때가 꽤 많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언제 만졌었는지도 기억한다. 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집 앞 고깃집에 가려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집에서 입는 바지에 패딩만 입었다가, 바지가 너무 후줄근한가 해서 바지를 갈아입었다. 그때 두 번째 입는 바지에 지갑을 옮겨 넣으려고 처음 입었던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는데 그 후로 보이지 않는다.
친구가 집 앞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는데 지갑을 어디 뒀는지 보이질 않았다. 어딘가 있겠지 하고 그냥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지갑을 못 봤다. 마지막으로 본 게 집 안이니 어딘가 있겠지 하며 시간이 흘렀다.
농협카드를 재발급받는데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은행으로 카드를 배송시켰다. 카드를 받으려면 신분증이 있어야 한다기에 이젠 지갑을 찾아야겠다 싶어, 퇴근 전부터 지갑을 꼭 찾고야 마리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과 둘이 살고 있는 우리 집은 24평 그리 넓지 않다. 이곳 어딘가에 지갑이 있다. 가장 먼저 내가 잠깐 올려놨을 법한 곳을 찾아봤다. 못 찾았다. 역시 쉽게 찾을 수 있을 리가.
어쩔 수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자주 쓰는 방법이다.
집 안 구역을 나눈다. 거실, 내방, 동생방, 주방, 옷방, 화장실, 베란다. 한방씩 들어가서 모든 수납장, 옷 주머니 속, 모든 공간 구석구석을 뒤지는 거다. 여기 찾았다 저기 찾았다 하면 계속 찾아봤던 곳을 찾게 되니 이 방법은 꽤나 유용하다.
어딘가에 있겠지 하며 온 집안을 뒤졌지만 모든 방 어디에도 지갑은 보이질 않았다. 이때부터 스트레스 지수가 짜증으로 변환돼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는데 보이질 않으니 짜증이 곧 화로 변할 것 같아 잠시 10분 동안 쉬었다.
다시 찾아보자. 신분증이 필요해.
찾다 찾다 없으니 이제는 상식을 벗어난 곳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냉장고 안을 열어서 반찬통 사이를 확인해 봤다. 부엌 찬장이나 옷장 속 양말 통도 뒤적거려 봤다.
그래 없을 거 아는데 그래도 확인해 본다 하며 신발장을 열어 여기 있나 하고 신발들을 속에 손을 넣어봤다.
분명히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온 집안 모든 곳을 뒤져도 나오질 않으니 이제 나 스스로가 의심됐다. 정말로 그때 내 바지 주머니 속에 있던 게 지갑이 맞나? 잘못된 기억 때문에 지금 괜한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차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 차에 가서 운전석, 뒷좌석, 트렁크까지 샅샅이 뒤진 후에 없는 걸 알았다. 차까지 공간체크를 마치고 나니 이제 지갑을 못 찾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카드사 어플을 켜서 마지막 카드 사용이 언젠지 확인해 봤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같이 있을 때 혹시 친구가 내 지갑을 챙긴 건 아닌지 확인해 달라 부탁까지 해본다. 없을 걸 알지만 그래도 거기라도 있었으면 하며.
없다, 없어. 몇 시간을 찾다가 더 이상 화가 나서 분노가 조절이 안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포기했다.
그래, 나 지갑 잃어버렸다. 이젠 없어. 어디서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지도, 어쩌면 누가 내 지갑을 훔쳐갔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다독여줬다. 내 잘못이 아니야. 지갑을 잃어버린 건 나지만, 누구의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내 잘못도 아니야.
부모님 염전에서 일을 돕던 날에 있었던 일이다. 오후까지 햇빛을 충분히 먹여서 소금판에 만들어진 소금을 내자고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예정대로 이따 오후에 소금을 내야겠다고 하셨다.
시간이 돼서 기계로 소금을 한 군데로 모으기 시작했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난 기계를 잠시 멈추고 옆판에 있는 엄마와 아빠를 바라봤다. 두 분도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알아챘는지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졌다.
나도 일단 서둘러 기계를 다시 움직였다. 지금은 상황에 대해 물어볼 게 아니라 소금이 비를 더 맞기 전에 빨리 모으자. 비가 멈추기를 간절히 바라며 최대한 빨리 기계를 몰고 있는데 빗방울이 계속 굵어졌다. 소금물 판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무거워진 게 들렸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아빠 쪽을 봤다. 분명히 비가 안 올 것처럼 말했는데.. 나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 아빠를 보니 뭐라 말할 생각도 사라졌다. 허겁지겁 움직이는데 그때 우리 세 사람의 발걸음을 천둥소리가 멈추게 했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저 멀리서 아빠가 그냥 두고 들어가자고 소리쳤다.
너무 많이 온다. 들어가자.
소금 창고에서 비를 피하며 장갑을 벗은 우리 세 사람은 말없이 조용했다. 오후에 소금을 내자는 건 아빠의 판단이었지만, 누구의 잘못인 게 그게 중요하겠는가.
그날 저녁 일을 안 한 우리 식구는 삼겹살을 구워 먹었던 것 같다.
글을 쓸 때, 온 우주가 나를 방해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카페 가서 글을 쓰려는데 도저히 이어폰이 보이질 않는다. 소리에 예민한 나는 노이즈캔슬링 없이는 글을 쓰는 게 힘들다. 도대체 어딨 지 하고 겨우 찾았는데 충전이 안돼있어서 배터리가 없다.
급속 충전기에 이어폰을 꽂고 충전 후에 집을 나선다. 카페에 도착해서 노트북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노트북 배터리가 없다. 9프로. 가방에서 노트북 충전기를 찾으려는데 아참, 내 방 책상에서 안 챙겨 왔다. 화면 밝기를 낮춰서 배터리 소모량을 줄여볼까 하다가, 얼마나 쓴다고 하며 노트북을 다시 덮어버린다.
집중력을 최대 수치까지 끌어올려 겨우 쓴 소설이 다음 날 읽어보면 재미가 없다. 분명히 어제는 재밌는 것 같았는데.
재미없는 글을 쓴 건 나지만, 어쩌겠는가 열심히 만든 글이 이리돼버린 것을.
어렸을 땐 이런 고난과 그 후에 분노를 맞닥뜨렸을 때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누구 잘못인지 판단하고 결과를 물었다. 내가 화가 나고 괴로운 만큼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탓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인 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리돼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카드 분실신고까지 마친 후에야 지갑은 내 방 선반 위에서 발견 됐다. 등잔 위가 어두웠던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그날 녹은 소금들을 다시는 볼 수 없지만, 그 소금물로 후에 다시 소금을 만들었다. 글이 재미없다고 느껴져서 자존감이 바닥을 쳐도 어찌됐 건 나는 다시 글을 쓴다.
어쩌겠어 다시 해봐야지 하고 생각하면 뭐든 괜찮아지게 된다. 온 우주가 날 가로 막으면 이 말버튼으로 우주를 건너가자.
좋아, 힘들어도 다시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