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도 추억으로 머무는 것을.......

"8월의 크리스마스"

by 페이지 성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ㅡ한석규의 마지막 내레이션ㅡ



엔딩장면입니다.

자동 모드로 하고

잠시 무표정.

옷의 단추를 단정히 채웁니다.

옅게 미소 짓는 그

연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그저 그런 날 같은 아침이 왔습니다.

잠자고 있는 정원의 얼굴에 햇살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른 하루가 시작되려는 예고일까요!


정원의 낡은 사진관에 문이 열립니다.

그 안으로 들어선 그녀.

두 사람의 만남은 친절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연인이 되려는 전조 따위는 없었지요.

첫눈에 아우라가 보였다든지,

내 귀에만 종소리가 울렸다든지....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인연처럼 다가왔어요.


사잔제공 싸이더스
사잔 제공 싸이더스
사진제롱 써이더스


주차 단속원인 다림은 일 때문에 사진관에 들릅니다.

애 둘 딸린 유부남이라고 자신을 말하던 정원은

어느새 그녀와 서울 대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타며

그녀와 시간을 공유합니다.

죽음 앞에서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간의 유한성 속에 무한한 감정의 흐름이 무채색 슬픔으로

다가오네요.



정원은 오래된 사랑을 마음에 묻고 있습니다.

희미한 옛사랑 그녀는 사진관 진열대 에서 시간에 바랜 채 남아있습니다. 어느 늦은 밤 할머니 한분이 영정 사진을 찍으러 방문합니다 곱게 한복을 입으신 모습에 정원은 둔탁한 뿔테 안경을 벗겨 드리고, 마지막 이승을 향한 옅은 미소를 남겨 드립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사랑도 기쁘게 남아있게 될까요!

겨울이 왔습니다.

둘이 달리던 한여름 학교운동장에는

뽀얀 눈이 쌓였습니다.

그를 앞서서 달리던 그녀의 머리칼과

젊은 날의 사랑이 싱그런 바람처럼 정원보다 먼저 달려갑니다.

아주 오랜만에 사진관 앞을 지나던 그녀는

그가 남긴 유서 같은 자신의 사진을 봅니다.

사진 속의 그녀가 정원을 보며 고백처럼

수줍게 웃고 있네요.

잊혀질 사랑의 흔적 앞에 그녀가

지금의 미소로 화답합니다.



작년 12월 6일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나카야마 유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알려졌어요.

겨울 눈꽃 같던 그녀가 겨울에 사망했어요.

많은 이들에게 잔잔한

사랑의 교과서 같던 영화!


순수한 첫사랑의 연인 유노의

"오겡끼데스까"가

설국으로 변한 벌판에 울려 퍼져 우리들 마음속에서 메아리칩니다.



우리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도 '러브레터'처럼

사랑을 그린 빼어난 수작입니다.

1998년 상영 작품이라니

벌써 27년이 지났네요.


청춘영화의 표상 "비트"와

이영애의 유혹의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의

'봄날은 간다'를 만든 허진호 감독의 작품입니다.


가수 김광석이 활짝 웃고 있는

영정사진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자살로 마무리 한 젊은 가수의 죽음을 보며

지금은 죽은 사람일지라도

생전 일상의 어떤 나날은

밝은 부분이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시나리오로 쓴 게 "8월의 크리스마스"랍니다.


젊은 시절의 한석규와 심은하 배우를 보고 싶어 제가 종종 보는 영화입니다.

따뜻하고 투명한 사랑의 추억을 되새기며 보기에 최고의 영화입니다.


모든 이의 사랑이 추억소환되는 아름답고 잔잔한

영화,

내 젊은 날도 내 인생에서는 주인공 배우가 되어 영화의 장면으로 만드는 영화이지요.


이름도 감성적인 초원 사진관.

사진관에서 시작해서 사진관으로 끝나요.

초여름에서 겨울로 끝납니다. 아무렇지 않게 계절이 배경이 됩니다.

사랑이 시작되었고, 잔잔하게 불타올랐다가 화로의 잔열로 남습니다.


배경 장소인 사진관에 온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사랑, 추억, 결핍, 콤플렉스, 이별, 죽음.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사진이란 매계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시간 속에 바래지고 잊힙니다.

사진관은 삶의 정류장입니다.



주인공 정원(한석규 분)은 죽음을 앞둔 환자입니다.

담백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시간처럼 남은 삶의 나날도 그렇게 마무리하려는 남자입니다.

그에게 다가온 다림(심은하 분)이란 여자는

이제 사회초년생으로 인생의 시작점에 선 여자입니다.

둘이 만난 접점이 된 사진관에서 곱고 잔잔한 사랑이 시작되었습니다.


한쪽은 사그라드는 불씨라면

한쪽은 막 그은 성냥불 같네요.

서두르지 않으며 감정을 키워갑니다.

둘의 사랑으로 정원이 사는 세상의 빛깔이

먹빛이 아니고 영롱한

무지갯빛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마치 죽어있는 듯 보이는 고목이라도

마지막에 찬란한 꽃을 피우라고

신이 준 선물로 보입니다.


이제 시작하는 사랑이 시작부터

벌써 너무 늦은 걸까!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짧은 추억일지라도 함께 머문 시간이

죽음 앞에 아름답게 저물어 가기 때문이지요.

세상에 늦은 것도 부질없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만나고 사랑하고 빛날 뿐이지요


핸드폰도 없던 그 시절, 편지와 전화만이 유일한

연결 수단이었던 시절에도 연인들은 만나고 기다리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오히려 절절하고 진정성이 더 했었는지도 모르지요.


기다림밖에 없는 연인이었기에 기다림에서 다림이란 여주인공 이름이 따왔을까요!


안타까워도 사랑이고, 상대보다 더 사랑해서 피가 철철 흐르는 사랑이어도 사랑입니다.

시대가 달라도 촌스럽지도 구닥다리도 아닌 공감하는 게 다른 이의 사랑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원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 이야기인데 우리네 사랑과 그리 다르지 않아요. 특별하지 않아 감동을 줍니다.

뜻밖에 받는 8월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11, 12월에 더 빛나는 8월의 싱그런 사랑 영화!

내 마음에 보석으로 박힌 영롱한 빛깔의 영화였습니다.






지금 이대로 잠들고 싶어


가슴으로 널 느끼며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고 싶어

ㅡ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ost 가사 ㅡ


사인제공 싸이더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