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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망

소중한 기억

by 이미숙

2.


방향 감각을 잃고, 앉았다 일어나는 기본적인 동작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지는 치매. 하루하루 힘겨운 시간을 보내시는 제주 할망. 고생 없이 착하고 선하게 살아오신 듯, 조용하고 고운 치매를 앓고 계신다.


"물질(해녀 생활)을 하셨나요?" 여쭈니, "아닌 것 같은디..." 기억이 흐릿하시다. 가족에 관해 묻자 "아들 하나, 딸 둘"이라 답하시지만, 당신의 형제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모든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가끔 아드님이 면회 오시지만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신다.


낮에는 거실에서 지내시도록 한다. 선생님들의 보호 아래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대소변이 마려워도 말씀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빙빙 도신다.


"화장실 가고 싶으세요?"

"네." 하지만 방향을 찾지 못하신다. 두세 살 어린아이처럼 늘 서성이시고, 방에 모셔다드려도 이내 다시 나와 두리번거리신다.


"앉아 계세요." 말씀드리면 앉았다가 이내 바로 일어나, "네!" 하고 대답하신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이 반복된다.


식사 시간에는 수저를 들고도 손으로 드신다. 숟가락 사용법을 잊어버리셨다. 도움을 드리며 다시 기억을 끄집어내려 하지만, 금세 멈추고 마는 일상. 무한 반복이다.


치매란 정말... 최고의 중병이다. 때때로 답답하신지 "바보!"라고 소리치며 당황하시고,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시지만, 생각대로 표현하지 못해 끙끙대신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세요?"

"네...." 그러나 이내 모든 걸 잊어버린 표정이다.


얼마나 갑갑하실까.


긴장과 불안감 속에 바지를 꼭 쥐고 자꾸만 당기신다. 바짓단이 올라가 있으면 "내려주세요." 수십 번 알려드려도, "네, 알았수다게." 대답만 하실 뿐, 손은 멈춰 있다.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듯한 모습....


기억을 끄집어내려 대화를 시도해 본다.

"백까지 숫자 세어볼까요?"

"하나, 둘, 셋....십이....이십일...."

"...."

"이십이, 이십삼....사십...." 어렵게 따라 하시지만 백까지는 힘드셨다. 그러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신다. 박수를 보내며 격려해 드리면 밝게 웃으시는 천사 같은 어르신.


"제주 노래 하나 불러보실래요?"

"다 몰라." 고개를 저으신다. 하지만 선율을 들려드리면 중얼거리시며 중간중간 따라 부르신다.


바람 부는 제주에는 돌도 많지만 인정 많고 마음씨 고운 아가씨도 많지요

감수광 감수광 감수광 날 어떡헐랭 감수광


- 혜은이의 <감수광> 中


"슬른사람 보낸시멘...." 기억을 더듬어 하나둘 따라 부르시다, 마지막엔 수줍게 "잘 모르겠수다게." 하시며 방언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 놓으신다.


따뜻한 물 한 잔 드리니, "맨또롱또돗하다!" 기분 좋게 따뜻하다는 제주 말. 이 순간, 그분의 어린 시절 고향이 조금이나마 떠오르는 듯하다.


손가락을 펴고 접는 간단한 동작조차 힘들어하시지만,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제주어는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제주 할망 한 분만 더 계시면 좋을 텐데." 이야기를 나누며 눈빛이 반짝인다.


아직은 대소변을 가리지만, 화장실 위치도, 사용법도 모르셔서 도움이 절실하다.


가족이 사다 놓은 과일을 드리며 "이게 뭘까요?" 여쭈니 "글시.... 무사.... 알 건디... 생각이 안남시...."

한참을 갸웃거리시다 한입 드시고 "맛 조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지으신다.


옆에서 보시던 한 어르신이 "나 하나 먹어보면 안 되나?" 물으시자, 천사 같은 웃음을 지으시고 "싫다!"라며 거절하신다. 순간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이내 "미안하다게." 머쓱해하신다.


어디로 가야 할지,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지 못하는 치매 질환. 그러나 자주 보는 선생님 얼굴은 익숙하신 듯하다. "옆에 조끄티 오라!" 가까이 오라며 손짓하시다 꼭 안아주신다. 그 따뜻한 포옹에 울컥할 때가 많다.


어르신의 마음속엔 어떤 감정이 자리하고 있을까.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보인다. 하루하루 기억은 더 사라져 가겠지만, 애정 어린 사랑의 감정만큼은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란다.


제주 할망, 진심으로 소랑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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