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오글오글 : 11월호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
<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11월호 주제는 '나를 표현하는 세 가지 단어'입니다.
이 주제를 받고 한참 고민했다. 과연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뭘까? 그런 단어가 있을까?
그래서 글쓰기를 계속 미루다 겨우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회피적인 성향이 강하다. 어려운 상황이나 감정적으로 부담스러운 순간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한 발 물러서거나 상황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상황은 때때로 편안함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되기도 한다.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일시적인 해답일 뿐이기에 결국에는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과제를 받으면 마감일까지 미루다가 쫓기듯 제출한다. 어떨 때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어차피 안될 텐데 시간낭비 하지 말고 그 시간에 다른 거나 하자'라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회피성향이 발동된다. 돌이켜보면 실패를 마주할 용기가 없어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 회피성향이 나를 이끌었던 것 같다.
또, 회피성향의 사람들은 선택권을 상대에게 넘기려고 한다.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성향의 사람들과 어울릴 때 유독 스트레스를 받는 걸 보니 나도 심한 회피형이구나 다시 깨달았다. 어쨌든 그런 내가 이 회피성향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올해 퇴사를 하고 AI관련 일을 하고 싶었다. 내 나이 40살에 전혀 경력도 능력도 없는데 대뜸 취직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알아보니 취업연계지원사업이 있더라. 예전 같았으면 온갖 걱정에 고민하다 포기했을 텐데 이번엔 그냥 지원해 버렸다. 불가능한 이유가 명백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리고 보름 후에 답변이 왔다. 이번 사업에는 참여하지 못한다는 답변이었다.
이게 왜 회피냐고?
선택권을 상대에게 넘겨버렸으니까. 내가 지원할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에 나를 뽑을까 말까 고민하도록 상대에게 넘긴 것이다. 나에게 선택권이 있을 경우 드는 생각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내가 될까? 조건이 안 맞는데? 나이도 많은데?부터 나는 왜 나이가 많을까, 왜 관련 공부를 안 해둔 걸까 하면서 나를 자책하는 화살로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택권을 넘겨버리면 긴장과 설렘이라는 감정만 남는다. 오히려 용기 낸 나를 대견하다 칭찬하기도 한다.
내가 고민하다 포기했을 때는 미련과 후회가 남는다.
하지만 선택권을 넘겨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빨리 과제를 해결해 버리면 결과가 별로여도 미련이 남지 않더라.
그리고 그 시간에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문제나 과제가 생겼을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해 빨리 토스해 버린다. 그렇게 사는 게 결국은 내가 원하는 걸 이루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회피성향은 단점이지만 공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MBTI가 없었다면 나는 나를 뭐라고 설명했을까?
사람들은 MBTI를 물어보면 혈액형 물어보듯 한심해하기도 한다.
"사람을 고작 그런 걸로 판단하겠다고? 으이그~"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나는 MBTI가 재밌다는 말을 아낀다.
하지만 나는 MBTI덕분에 나를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평소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한 성격일까?'부터 나의 모든 단점을 숨기려고 애썼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MBTI가 나오고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정말 많다는 걸 알고 난 후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 오히려 서로 경험담을 올리면서 "나도 나도"라는 댓글이 달리는 걸 보면 기쁘다.
"휴~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안심도 된다.
그중 유독 나를 이해시켜 준 건 <J : 계획형 인간>이라는 표현이다.
유난스러울 정도로 계획을 세워야 안심이 되던 내가 유별난 사람인 줄 알았는데 <J or P> 라니? 반반의 확률로 세상엔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거잖아. 요즘에서야 J가 계획대로 실천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계획대로 안 될 때 스트레스받는 유형이라고 하지만 둘 다 맞으니 상관없다.
어쨌든 나는 J다. 앞으로도 즐겁게 계획을 짤테다.
마지막 단어는 무모함이다.
무모함은 용기와 철없음을 의미하는 단어처럼 들린다. 왜냐면 내가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나의 무모함 덕분에 이룬 것도 잃은 것도 많다. (구질구질한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 접어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모함 덕분에 나는 이곳에 와 있다.
결혼 전 연애하던 분 부친의 생일이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편지를 써서 선물과 함께 보낸 적이 있다. 당시 나의 마음은 그저 축하의 의미였으나 상대의 아버지는 나를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후문이. 어쨌든 나는 계획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할 때가 많다. 여기서 j라며? 모순이야.라고 할 수 있겠으나 사람은 늘 이중적이고 상반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명심하자.
나의 무모함은 호기심에서 나온다. 어릴 때부터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어 이해가 될 때까지 묻고 또 묻던 아이다. 아빠는 이런 나의 수다스러움을 참지 못해 늘 빨리 자라고 하셨다. 엄마는 늘 똑같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시는 분이었는데 너무 일찍 내 곁을 떠나는 바람에 나의 호기심은 짐이 되었다. 그 뒤로 나의 호기심이 새어 나올 때마다 꾸지람을 들었고 속에 꾹꾹 눌러놨던 호기심이 폭발하면서 무모함이 되었다. 20살이 되던 해 내가 짐을 싸 집을 나오게 된 이유도 아마 이런 무모함 때문이었을 거다.
내 위로 오빠가 한 명 있다. 나와 다르게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모님 집에서 지내며 나를 특이한 동생으로 취급하면서도 약간의 부러움이 섞인 듯한 말을 하기도 했다.
"쟤는 희한하게 지 하고 싶은 거 다한다."
나 하고 싶은 거 반에 반도 못하고 살았거든?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나를 책임져야 했던 오빠에 비하면 나는 어떻게든 했으니 입 안에서 맴도는 이 말을 꿀꺽 삼켰다.
무모함 덕분에 지름길을 두고 빙빙 돌아 여기에 있다. 물리적 위치가 아닌 삶의 위치 말이다.
나를 설명하는 세 가지 단어, 회피, 계획형, 무모함. 이 셋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특성들이다. 회피하는 마음 때문에 많은 걸 미뤘지만, 그 덕에 신중함과 실행력을 배웠다. 치밀하게 계획했지만 예상치 못한 무모함이 스스로를 이끌어내는 힘이 되었고, 그 길 위에서 예상하지 못한 기회와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특성이 한데 얽혀 나를 지금의 삶의 위치로 데려왔다.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회피하고, 계획하고, 무모하게 무언가를 선택할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그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방식이고, 나만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