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늘 그랬다. (이 사건의 시점보다 훗날의 사건까지 합하면 늘 그랬던 게 맞다. 확증편향일지라도 너는 항상 그랬던 걸로 치자. 어차피 이건 내 기억의 산물이니 마음대로 왜곡하자. 흥.)
늘 중요한 순간에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것도 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
네가 나를 찾아온 그날은 내가 중요한 시험을 한 달 앞둔 때였다.네가 내게 다시 만나자고 하던 그날로부터는 한 달이 지난 시점. 그러니까 너는 내 시험 두 달 전에 나에게 다시 만나자고 하였고, 내 시험 한 달 전에 나에게 이별을 결.정.해.달.라.고 찾아왔다.
너를 여전히 사랑했겠지만 더 이상 믿지 못했던 나는, 너와 다시 만나기로 한 날로부터 한 달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있던 여유도 묻어둘 만큼 시험이 코앞이었던 탓도 있었으나 나를 시험에 들게 한 너를 나 또한 시험해보고 싶은 오기였다.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한 날부터 한 번도 먼저 너를 찾지 않았다. 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시험했다.
한 달 동안 연락 없던 네가 찾아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네 결정에 따를게."였다.
'결정? 무슨 결정? 결정은 이미 내리고 온 거 같은데?비겁한 자식, 그래 원하는 답을 해줄게'
"헤어져." 나는 말했다.
추가로 할 말은 없었다. 화가 났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때의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였더라도 나는 더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그를 만나고 있는 시간도, 결별로 인해 내가 흔들릴 시간도 다만 아까울 뿐이었다.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은 배제해야 마땅했다.
너는 내 말을 듣고 일어섰다. 나처럼 더는 할 말이 없었던 건지, 원하는 대답을 들어서 홀가분했던 건지는 모른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가 너에게 최고의 사람이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헤어짐에 누구 지분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새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치르게 된 데에는 너도 절반의 책임, 아니 반의 반 정도의 책임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손해 본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퇴사하고 외국으로 떠나려던 계획을 접고 한국에 남게 된 건 네가 제안했고 내가 수락한컬래버레이션의 결과였다.
최종적으로 한국에 남아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처한 내가 재취업을 위해 시험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니 내 인생의 방향 설정에 네가 끼친 영향도 분명 있기는 한 것이다. 여하튼 결정은 내가 내린 것이어서 내 탓만 해야 하는 게 지성인으로서(?) 옳은 자세(?)일 수는 있겠으나 결과가 이렇다 보니 네 탓을 조금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헤어져(주겠다)라는 말 외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찻집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해봤자 의미 없는 말이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또 쓸데없이 말을 아꼈다.
친구는 말했다. 나는 그 애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걔가 널 많이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 그리고 너한테는 잘하니까 괜찮다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네가 날 많이 좋아하는 건 맞으니까라고.
간과한 게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사랑도 자신을 위해 하는 거라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이별의 선택권을 선심 쓰듯 내게 던진 너는 알고 있었으려나. 네가 얼마나 스스로를 아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