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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식 Aug 27. 2024

압생트에 취한 생명의 춤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1)

작가의 말 : 저는 항상 소설을 쓰기 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내곤 합니다. 때로는 회고적이며, 때로는 일상적인 문장은 저에게 새하얀 접이 지팡이가 되어주죠. 노련한 맹인이 지팡이를 저어가며 새까만 공간을 나아가듯 저 또한 아마 이런 의미 없는 문장들을 통해 이야기 혹은 소설이라는 앞이 보이지 않는 행위를 이어 갑니다. 소설의 주제나 인물들의 설정, 갈등 따위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이런 글을 쓰고자 했구나 하는 감각만이 담겨 있을 뿐. 감각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탕, 하고 날카로우며 경쾌한 소리가 나자 어수선한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낙찰입니다! 감사합니다." 미술품 경매사인 던은 미묘한 표정을 짓는 동시에 왼손에 든 가벨을 내려치며 낙찰을 확정 지었다. 해머 프라이스(최종 낙찰가) 490억 5300만 원. 에드바르 뭉크의 <The dance of life>.  


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에 패들을 올려놓고 묵묵히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낙찰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은갈치색의 정장과 얇은 금테 안경을 쓴 노인. 표정에서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인도양의 가시왕관불가사리처럼. 이윽고 사람들은 노인을 남겨둔 채 썰물처럼 경매장을 빠져나간다.


배를 타야만 들어올 수 있는 섬지역, 사람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붙어있는 몇 개의 목조 주택을 제외하곤 짙은 녹색의 논과 밭이 대부분이다. 포구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다 보면 은은한 건물이 보인다. 이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이 던이 아트 경매사로 활동하는 옥션 하우스 '베일레인'이다.


감정실의 단추 퀼팅이 박힌 빨간 고급 소파 2개가 무릎 정도 높이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테이블 위엔 금테두리 케이스에 담긴 뭉크의 작품이 놓여있고 던은 작품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수수료 16.5%를 더한 591억 6050만 원이 최종 구매가입니다. 대금 지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던의 옆에 앉아있는 사무장이 맞은편의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한동안 가만히 작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분명 낙찰을 받고 대금 지불을 못 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30%가 맞나 궁금하네요."


던은 노인의 차분히 던진 질문을 몇 번이나 곱씹고 나서야 질문의 의미를 이해했다. 아마 옆에 앉은 사무장 또한 아마 던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위약금이라니 지금 와서 돈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노인의 금테 안경을 노려보았다.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근 5년간 수차례의 고가 예술품 경매를 진행한 던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낙찰자가 진정으로 예술품의 가치를 이해하는지, 자금 세탁이라던가의 다른 목적으로 수단으로 취급하는지, 패들 싸움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낙찰받았는지까지. 보통 유명한 작품의 경매를 진행하게 되면 리듬이란 것이 존재한다. 경매사로서는 호가를 높이거나 낮추거나 하는 등의 여러 테크닉을 사용해 리듬을 유지하거나 왜곡시킨다. 별다른 특기가 없던 떠돌이 던이 베일레인의 중요한 경매를 도맡아 하는 이유도 그러한 기술을 인정받아서일 것이다. 그 스스로는 전혀 자각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의 노인은 그러한 리듬에 휘말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유명 기업의 오너나 정치인들, 지식인으로 칭송받는 연예계에 몸담은 사람들까지 베일레인에서는 던의 페이스에 말려 흡수된다. 경매에 들어가기 전 그는 무의식적으로든 자의적으로든 얼마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다. 던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하며 찰나의 순간에 짓는 미세한 표정, 손짓, 목소리 톤, 호가의 간격의 영향인지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마음속으로 정한 낙찰가의 언저리에서 낙찰된다. 하지만 오늘의 마지막 경매품인 The dance of life만큼은 달랐다. 350억 정도가 적당한 낙찰가라는 생각으로 경매를 진행했지만 실제로는 490억 정도에서 확정되었다. 오히려 경매사인 자신이 참여자들의 페이스에 휘말린 것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연주의 중심에는 바로 앞에 앉아있는 저 노인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부러 가격을 올리려고 했단 말인가.


"결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합니다. 30일 이내에만 지불된다면 말이죠. 하지만 낙찰 포기를 하신다면 기간에 상관없이 70%의 위약금을 내야 합니다. 이번 낙찰건에 대해서는 대략 343억이 되겠군요" 사무장이 대답했다. 대단한 암산 실력이다.


"70프로라니 생각보다 비싸군요."


"베일레인이니까요" 사무장이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대금을 지불할 능력은 없습니다. 물론 위약금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노인은 작품 속,손을 맞잡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쌍의 연인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위약금을 못 낸 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진행되는 겁니까" 노인의 담담한 눈동자에 무엇인가 담겨있다. 던이 말려들었던 그 리듬일지도 모른다.


"위약금은 343억입니다. 지금까지 베일레인이 대금을 못 받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사무장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던은 사형집행을 눈앞에 둔 죄수가 된 듯한 감각을 느꼈다. 담담하리만큼 섬뜩하다. 실제로 있는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렇군요." 노인은 그림 속 빨간 드레스의 여인에서 시선을 거두며 일어났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꺼운 악어가죽 코팅 문을 열고 가는 노인의 뒤로 사무장이 말을 던졌다. "30일입니다"



"저 노친네 패들 번호가 134번이었지? 사전 등록폼에 적힌 인적사항 정리해서 회수팀에 연락해. 아니다 연락은 아직 하지 말아 봐" 노인이 나가자 사무장이 시가에 불을 붙이며 던에게 말했다.


"네"


던은 파일철에서 134번을 찾아 회수팀에 메일을 보내려던 찰나였다.


"뭐 하는 놈이야?"


"첼로 제조 공장 사장이네요. 매출규모는 1500억 정도의 중소 제조업체입니다."


"하긴 운영부서에서 아무나 받을 리는 없지. 현장에서 뛰는 우리보다 더 철저한 녀석들이니까. 육지로 가는 배 시간은 한참 남았으니까. 네가 가서 한 번 알아봐. 웬만하면 잘 설득해 보고. 너도 알잖아. 회수팀 애들한테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놈들이야. 아무리 같은 회사 직원이라지만 생각만 해도 혐오스럽군." 사무장은 떫은 열매를 햛기라도 한 듯 코 주위 근육을 찡그리며 말했다.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호화 여객선은 하루에 딱 2번, 경매가 진행되는 날에만 운영된다. 이 배를 놓치면 꼼짝없이 다음 경매가 열릴 때까지 섬에 갇혀있어야 한다. 노화된 이 섬에서 어선의 씨는 이미 말라버렸다. 던이 포구 앞에 도착할 때쯤 시곗바늘은 오후 6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곧 해가 지고 베일레인의 유람선이 들어온다. 항구 쪽에 거의 다다르니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경매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무리를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럴 만도 하다. 베일레인이니까. 예술품에는 관심이 없어도 세계의 정경계 인사들과의 커넥션만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고작 1500억 규모의 첼로 회사 사장이 경매 참여 승인을 어떻게 받았을까, 하고 던은 허리를 숙여 풀린 굽구두의 끈을 묶었다. 참여자들 앞에서는 항상 단정히 할 것, 베일레인의 경매사가 지켜야 할 수많은 의무 중 하나다. 간혹 던을 알아보고 짧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정중한 인사로 보답하며 은갈색의 노인을 찾아다녔다. 포구 주위의 어느 곳에서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급 양복의 사람들,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잔잔한 바다. 이미 낡아버린 목조 위스키 바들만이 보일 뿐이다. 경매장에서 항구까지는 이어지는 길 주위에는 넓은 밭이 펼쳐져 있다. 만일 노인이 길을 벗어났다면 오는 길에 보였을 것이다. 어디로 증발해 버린 것인가, 문득 던은 한 장소가 생각났다. 단순한 직감이다. 이 섬에서 던만이 알고 있는 공간, 노인의 리듬을 쫓아 발걸음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베를레인의 세속적인 건물 뒤편에는 꼭대기가 안 보일 정도로 높은 나무들이 벽을 이루고 있다. 그 벽을 경계로 섬의 분위기는 180도 바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계곡처럼 빛은 나무를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던은 으스스할 정도로 어두운 숲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공간을 향해 걸어가며 던은 처음 이 숲에 왔던 때를 떠올렸다. 예술가라는 꿈을 포기했지만 차마 놓아줄 수는 없었던 5년 전의 던은 스스로를 섬에 가뒀다. 경매가 없는 날이면 포구의 방파제에 걸터앉아 등대에 가려진 해가 질 때까지 그리기에만 열중했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팔리거나 경매작으로 선정되는 일은 없었다. 섬 생활이 2년이 지날 무렵, 던은 무겁던 붓을 내려놓았고 600여 점의 작품을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다. 압생트가 담긴 글라스는 확실히 플랫한 붓보다는 가벼웠다. 영감의 원천이던 포구 앞바다는 압생트를 빛내주는 배경으로 전락하였고 술기운이 올라올 때마다 바다에 몸을 던질까 수차례 고민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평상시와 같이 술에 취해 베일레인 건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평상시보다 도착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니 자신도 모르게 나무 벽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제정신이었다면 그곳으로 들어갈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빛이 없음에도 따사로운 향에 이끌려 무작정 걷다 보니,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거대한 주름나무와 얇게 코팅된 사다리, 사다리의 끝에는 작은 발코니를 포함한 소박한 오두막. 오로지 그 나무와 주변에만 빛이 비치고 있었다. 회상 속의 나무 오두막이 3년 후의 지금, 던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숲 속의 유일한 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사다리를 올라갔다. 오두막 안에는 던이 직접 옮겨놓은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가 구석에 놓여있고 맞은 편의 벽에는 이름 모를 그림이 걸려 있다. 노인은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뭐 하고 계십니까? 곧 배가 도착할 시간입니다." 던이 노인 쪽으로 말을 던졌다.


노인은 오두막에 던이 올라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여전히 그림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아까의 낙찰 건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참 신기하네요. 그렇게 어둡던 숲 안에 이런 장소가 있다니."


노인 주변의 정중하고 차분한 공기에 매료된 던의 속에서 순수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본의 아니게 신청폼을 보았습니다. 첼로 공장을 운영하고 계시더군요. 낙찰 포기를 한다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혹시 말 못 한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저는 예술에 그리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닙니다."노인이 시선을 던에게로 옮겼다 "노을 지는 하늘의 다리 밑에서 일그러뜨린 얼굴을 한 남자의 그림이 뭉크의 <절규>라는 것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혹시 결혼은 하셨습니까?"


"아뇨."  대답을 하며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본다. 가물가물하다. 이미 세상에서 없어진 그녀의 이름은.


"실례했습니다." 노인이 정중히 목을 숙여 사과한다. "저는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습니다. 첫눈에 반한 상대와 말이죠. 저에게는 분명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넉넉한 환경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하는 것 대부분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 시기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다. 뒷자리에 앉아 항상 특정 시간에 창문 밖 풍경을 바라보던 소녀, 그 깊은 눈동자에 그는 서서히 빠져들었고 가지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창문을 바라보던 이유가 그녀의 남자친구 때문이었음을 깨달은 그는 절망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하며 그 순간이 찾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다렸다.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는 고등학교 근처의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노인 또한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이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서서히 그들에게 다가갔고 어느새 같이 어울려 놀게 되었다. 그들과 어울려 싸구려 바에 앉아 양주를 마시면서 끊임없이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사랑은 점도가 높은 팔레트 위의 아크릴 물감처럼 20대 초반의 것이라기엔 너무나도 단단했다.


"그 시기는 지금처럼 평등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노인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여자와 남자를 자신의 집에 초대해 위스키를 대접했다. 천천히 알코올을 들이키며 그들은 깊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남자의 글라스에 수면제가 타 있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어지간한 소리로는 깨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들었다.


"벌써 취했나 보네. 그럼 나는 먼저 집에 가 볼게. 잘 챙겨줘" 여자가 방바닥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조그마한 핸드백 체인을 어깨에 걸고 뒤를 도는 순간.


"그건 성욕에 지배된 본능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지 분명, 오히려 순수한 사랑의 표출에 가까웠어" 노인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녀를 덮쳤다. 비명을 지르며 저항해도 소용없었다. 그녀의 유리 글라스에는 근육 이완제를 탔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한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시대였기 때문에. 마음이 없더라도 몸을 허락한 순간 결혼을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것이 자의적이든 혹은 강제적이 든 간에.  


"지금까지 결혼 생활을 이어오며 그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습니다. 다른 여인에게 일말의 호감을 품은 적도 없고 말입니다. 가지고 싶어 할 모든 것을 그녀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없었죠. 그럼에도 나름 행복한 결혼 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저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요."


던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때로는 행복한 추억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 눈동자를 빛내는 노인의 얼굴을 보며 추악한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한 던의 감정을 모르는지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작년에 아내가 죽었습니다. 욕조에서 자신의 손목을 그은 채 말이죠.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옛친구를 만나게 되었다며 평소에는 보기 힘든 미소를 지었던 다음 날. 바로 그 다음날, 그토록 제가 원했던, 또한 사랑했던 그녀가 그렇게 싸늘한 인형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 거실의 테이블에 편지지 하나가 놓여있었습니다. 제 세상은 그날 무너져버렸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는 20대 초반의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죠."노인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저는 그녀의 육체는 가질 수 있었지만 영혼만큼은 끝내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인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첼로 공장 또한 내놓았다. 2000억에 인수하려는 법인의 오너와 미팅을 가졌고 거기서 베를레이 카탈로그를 우연히 발견했다.


"브로셔에 찍힌 뭉크의 작품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습니다. 혼자 서 있는 여자와 경쟁하는 남자들 그림 가운데 춤을 추고 있는 빨간 드레스의 여자와 검은 턱시도의 남자. 분명 그 남자야말로 제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뭉크의 작품을 떠올린 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생명의 춤>이라는 작품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그의 역겨우며 애처로운 사랑은 작품의 그 남자와 닮아있다. 물론 가운데의 창백한 남자는 아니다.


"제 인생 그 자체인 그 작품에 제가 값어치를 매기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강한 끌림을 받았습니다. 비록 양방향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는 사랑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브로셔에 적힌 시작가격 120억은 너무나도 싼 값이었습니다. 다행히 제 공장을 인수하려던 남자는 베를레인의 관계자였고 사업체를 헐값에 넘기는 조건으로 경매 참가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의 사업체 규모가 작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베를레인에 오는 다른 참가자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그런 뒷사정이 있었군, 하고 던은 쓴웃음을 지었다.


"낙찰을 받고 그림을 눈앞에서 보니 허탈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제 사랑 그 자체라고 생각했던 작품의 턱시도남자는 제가 아니더군요. 오히려 저는 불쾌한 짐승과 같은 표정으로 여자를 안고 있는 뒤편의 남자였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살 수 없습니다."


위약금을 내지 않으면 신변에 위험하다는 말이 던의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처음에는 노인의 표정이 온화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착각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작품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던 그때의 자신과 같다. 노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하고 있다. 일말의 동정심이나 연민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창작자에 대한 감탄과 묘한 열등감이 들었다. 예술에 무지한 저 노인 또한 뭉크의 작품을 보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다. 아마 나는 그런 작품을 그릴 수 없겠지. 평생. 그 남자의 말처럼 내 그림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놓치고 있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배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빨리 안 가시면 몇 달은 섬에 갇혀 계셔야 할 겁니다. 같이 내려가시죠" 던이 말했다.


"제 이야기에 대한 감상은 없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저는 평범한 베를레인의 경매사입니다. 단지 예술품과 사람을 이어주는 중개인이죠." 던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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