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2)
작가의 말 : 예술가의 꿈을 포기함으로 삶의 안정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그 경계의 끝자락에라도 매달려 있고 싶은. 경매사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더위를 먹었는지 머리에 안개가 반죽되어 펴진 느낌이지만 캔커피면 충분합니다.
"다음 경매는 아마 2주 뒤에 열릴 거야. 이번에도 섬에 있으려고?" 사무장이 말했다.
"네, 딱히 나가서 할 것도 없고요. 차라리 섬에서 가만히 바다를 보며 시간을 때우는 편이 유익합니다. 사무장님은 어서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아까 들어오며 봤는데 이미 배가 포구에 도착해 있었거든요." 던이 말하며 감정실의 소파에 몸을 던졌다. 천장에 달린 공작의 펼쳐진 섬세한 깃털들을 연상시키는 펜던트가 눈에 들어온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깨진 파편들이 날아와 몸을 소파에 박제시킨다. 공간의 한 부분으로서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정실은 베를레인 건물의 다른 방들보다는 천장이 조금 더 낮다. 퀼팅 쿠션소파와 테이블, 유명한 개인 변호사 사무실에 있을 법한 테이블과, 사무장의 이름이 박힌 네임플레이트. 새하얀 벽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던은 이 공간을 아늑하다고 느낀다. 지금까지 감정실에 들어올 수 있었던 사람은 사무장과 던, 낙찰자 이 셋뿐이다. 간혹 개인 감정사를 데려오는 초짜 경매인들이 있지만. 허용되지 않는다. 이유는 알지 못한다. 던이 체험하는 공간의 아늑함은 이러한 비허용적인 특성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이번에는 안 나가려고. 오늘 아침에 들어올 때부터 결심한 일이야. 저거 봐봐" 사무장도 맞은편의 소파에 앉으며 테이블 옆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케리어를 가리켰다. 사무장의 겉옷은 어느샌가 여름에 적합한 린넨 소재의 편안한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던은 놀라 소파에서 빠르게 앉은 자세로 일어나며 말했다. "네?" 사무장이 섬을 안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언가 바뀌고 있다. 던은 숲벽 안의 한정적 빛의 공간을 떠올렸지만 오두막의 위치가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내리쬐는 조명을 벗어나려는 듯한 의지가 던의 정적인 머릿속 이미지에서 느껴진다.
"이봐,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사무장이 장난스레 톤을 높여 말했다. "서운하네. 뭐 어쩔 수 없어. 나한테도 사정이란 놈이 있거든. 누구나 내 나이쯤 되면 하나 정도는 있기 마련이야."
"절대 싫은 건 아닙니다. 단지 처음이라 놀란 것뿐이에요." 던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항상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이는 저 남자에게 무슨 사정이 있을까, 하고 던은 의아에 했다. 던은 이곳에 온 지 3년이 지난 시점에 사무장을 처음 만났다. 전에 있던 사무장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평상시처럼 말도 없이 홀연히 증발해 버렸다. 항상 조용하고 속을 알 수 없던 사람인지라 사라지고 난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채운 것이 지금의 사무장 '메이'다. 올백 머리와 날카로운 눈, 적당히 매끄러운 콧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조각상 같은 그의 모습에 인간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에게 나름대로 인간적인 호의를 품고 있다.
"경매도 끝났는데, 양주나 마시러 갈까? 네가 잘 아는 곳으로 추천해 줘" 사무장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경매 참여자들이 나가고 나면 섬에는 던과 메이 둘 뿐이다. 당연히 섬에는 위스키바 주인도, 날리는 벌레를 쫓아내는 배추농사인도, 심지어 이상한 나라의 허수아비조차 없다.
"알겠습니다." 오늘 알코올맛은 그리 씁쓸하지만은 않겠군, 하고 던은 2층으로 압생트와 글라스를 가지러 갔다.
다 쓰러져가는 포구 앞 '위스키바'로 던과 메이가 들어간다. 카우보이의 모험을 다룬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디자인의 술집이다. 들어가자 정면에는 여러 술들을 진열하는 백바와 일직선의 바카운터가 보인다. 당연히 진열된 술병은 모두 빈병이다. 베를라인이 이 섬을 찾아내기 전 마지막 생존자가 술을 다 비우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다 비운 술을 다시 정성스레 진열한 이유는 무엇일까. 점점 이 장소의 옛날 시간대에 빠져드는 중 메이가 말을 꺼냈다.
"분위기는 괜찮네. 조명은 당연히 들어오지 않겠지?"
메이의 물음에 던의 시계를 잠시 들여다보고 말했다. "8분만 있으면 달빛이 들어옵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메이의 호기로운 말을 시작으로 둘은 바스툴에 앉아 서로의 글라스를 채워주었다.
"첫 잔은 원샷이야. 서로 재미없게 빼지는 말자고. 지금부터는 말 편하게 해. 이름도 그냥 메이라고 불러."
"그래" 잠시 머뭇거리던 던이 짧게 대답하며 먼저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메이는 그런 던의 갑작스러운 반말에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흥미로운 영화의 한 장면을 보기라도 한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던과 눈이 마주치자 무언의 압박을 느꼈는지 그대로 손에 든 글라스를 입에 털어 넣었다. "샌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남자다운 구석이 있네." 입 주변을 손으로 닦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던의 글라스를 채웠다.
"내가 채워줄게" 던이 메이의 손에 든 압생트병을 이어받으며 말했다. 누군가와 술을 마신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니, 잊고 있던 감각이 하나 둘 깨어나는 느낌이다. 빗속에서 만나 블론드 단발의 그녀를 잠시 그려 보았다. 던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 톤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사무장이 자신의 이런 감정을 눈치챈다고 상상하면 어딘가 자존심이 상한다.
"원래 조금 프리한 성격인가 봐. 맞지?" 던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던이 반말을 할 때마다 메이는 흠칫했다.
"아니야. 그런 거. 근데 뭐 해 잔 안 비우고."
던의 말에 바테이블을 보니 이미 그의 글라스는 비워져 있었다. 첫 잔만 원샷으로 할 생각이었지 계속 글라스로 마실 생각은 아니었기에 난처했지만 비울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얼굴에 화끈함이 느껴졌다. 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사이 다시 던이 자신의 글라스를 채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던과 사적으로 술자리를 처음 가져보는 메이지만 후회가 된다. 단순히 어딘가 조금 우울해 보이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미친 녀석이다.
어느샌가 달빛은 무너진 위스키바의 벽 틈새로 들어와 압생트와 금이 간 유리 글라스를 빛낸다. 메이와 던의 살짝 붉어진 얼굴과 선명히 대비가 되지만 섬 속의 하나의 장면으로서는 충분했다.
"2주 뒤에 열리는 경매 브로셔 본 적 있어?" 메이가 글라스를 살짝 입에서 떼며 말했다. 내면에서 던을 교류할 만한 인간으로 분류했는지 지금까지는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톤이다.
"아니. 안 봤어. 왜인지 미리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거든." 던이 말하며 메이가 들고 있는 글라스에 압생트를 더 들이붓는다.
"이봐, 내가 졌어. 그만 따라줘" 메이가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던에게 말했다. 글라스를 천천히 내려놓고 다시 말을 이었다. "기획실에서 이번 경매는 특히 더 신경 쓰는 모양이야. 네가 그 노친네 찾으러 갔을 때 사장한테 직접 전화가 왔어. 이름이 뭐였더라. 폴.. 폴리 베르세르크?"
"폴리 베르제르의 바. 마네" 던이 끼어들었다.
"맞아, 맞아. 확실히 그 이름이야. 최소 500억 이상은 넘기라는 지시였어. 다음 여객선에서 작품이랑 경매자들이 실려올 때. 바람잡이도 같이 보낼 모양이야. 너한테는 미리 말하지 말라 했는데. 네가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근데 사장이랑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야?"
던은 말없이 글라스를 들었다. 입을 열지 않고 싶어 한다는 의도를 알아차린 메이도 조용히 글라스를 들었다. 달빛이 위스키바를 빠져나갈 무렵 어느새 압생트 3병이 말끔히 비워졌다. "이제 슬슬 나가볼까. 쑥 향이 가게 안을 가득 매웠군" 메이가 말했다.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그린듯한 포구 앞바다, 도금이 벗겨진 폐어선의 벌크헤드를 바라보고 메이와 던이 서 있다. 어선들의 꼬리는 철물점에 자리를 잘못 잡은 먼지 낀 에어컨의 날개들처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파도의 위아래 펌프운동에도 좀처럼 가까어지거나 멀어지지 않는다. 녹색요정이 선사하는 취기가 사라지면 메이와의 관계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하고 던은 조금 씁쓸함을 느꼈다.
"이런 좋은 장면을 너만 보고 있었다니.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주지. 이렇게 섬의 밤풍경을 보는 건 처음이네"
"저는 매일 보다 보니 그렇게 아름답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던이 메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음..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훌륭한 압생트라도 매일같이 마시면 질리는 법이야.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메이가 멋쩍은 듯 뒤통수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압생트는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습니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고요" 던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폴리 베르세르.. 뭐였더라" 메이가 주머니에서 꺼낸 쿠바 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폴리 베르제르의 바입니다"
"맞아 맞아. 폴리 베르제르의 바였어. 우리끼리는 폴리라고 부르기로 하자고. 그 편이 더 효율적이잖아. 하여튼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더군. 비슷하게 여성을 그린 그림, 이름이 뭐였더라... 옥걸이를.."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
"맞아. 워낙 다루는 작품이 많아서 이름이 헷갈리네. 그 작품이 아마 낙찰가가 130억대였지?"
"130억 5420만 원입니다.'
"기억력이 좋군. 역시 베를레인의 경매사야. 이건 순전한 호기심에서 묻는 질문인데 경매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잖아. 130억이면 130억이고, 130억 5000만 원이면 5000만 원이지, 왜 의미 없이 20만 원의 호가는 부르는 거지?"
"의미 없는 호가는 없습니다. 몇억 대의 작품이기에 고작 20만 원의 호가가 더욱 가치 있는 법이죠"
'고작 20만 원의 호가가 더욱 가치 있다' 메이는 던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 번 더 되뇌었다.
"이야기가 딴 길로 새 버렸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옥목걸이도 130억대였는데 폴리 작품에 500억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메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뇨. 아마 100억대에 낙찰될 겁니다." 던이 단호하게 말하며 포구에 걸터앉았다. 메이는 그런 던의 대답에 조금 놀란 기색이다. 작품의 의미는 개개인에 달렸다라느니 그런 건 정해지지도 않고 정할 수도 없다는 식의 답변을 예상했다. 냉장고 안의 콜라병을 머그잔에 따라 마신 후에야 간장이었다는 알아차렸을 때의 느낌이랄까.
"작품의 가치는 구매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메이가 다시 질문을 하며 던 옆에 걸터앉았다. 몸이 밀착하자 던은 살짝 놀랐지만 굳이 옆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람의 온도가 몸 속의 알코올을 더욱 깊게 데워준다.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작품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만일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작품은 어떠한 것도 담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준점 혹은 선을 정합니다. 물론 기준이라는 것은 조금 더 입체적일 수 있고요. 그 기준을 통해 닮은 점을 중심으로 새로 접하게 되는 작품을 판단합니다. 그 기준을 정하는 자가, 기준의 영향을 받는 모든 이에게 의미를 강요하는 것이며 기준을 정하기 위해 관련된 다양한 사람이 여러 줄이 가운데에서 교차된 줄다리기를 합니다. 작가, 화가, 컬렉터, 정치인, 사상가 등 모두가 참여하는 줄다리기입니다. 물론 평범한 중개인에 불과한, 단순한 경매사인 저 또한 줄다리기를 하죠." 던이 말했다.
"나는 비록 예술작품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다른 후각은 발달해 있지. 내가 느끼기엔 너는 경매가를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 그렇지?" 메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폴리라는 작품 500억대에 낙찰시킬 수 있겠어?" 희미한 미소는 이미 사라져 버리진 오래다. 무언의 압박. 메이는 자신의 말에 그러한 의도를 눌러 담았다.
"능력을 물어보는 것이라면 아마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 또한 저만의 기준점이 있기 때문이죠. 폴리 베르제르의 바가 담고 있는 무언가에 500억을 매길 수 없습니다. 잘 봐줘야 112억이죠" 던은 메이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슬슬 일어나서 돌아갈까요?'
'이래서 2주 동안 섬에 있으라는 거였군' 하고 메이는 회장의 말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다음 경매에 나갈 작품 중에 폴리 베르제르의 바가 있다네. 500억을 넘겨보게. 강요는 아닐세. 아마 우리 훌륭한 베를레인의 경매사는 납득하지 못할 거야. 그 녀석이라면 안 봐도 뻔할 일이지. 경매가 끝나고 섬에 남아서 설득해 봐. 던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네. 물론 자네에게도 말이지]
회수팀 팀장이었던 메이는 어딘가 암울하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다 위에 걸린 달을 응시하는 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제발 캐리어 안의 고문도구를 쓸 일이 없기를.
'지시를 받으면 어떻게든 이행한다. 그것이 내가 베를레인에 존재하는 이유야.'
위스키바에서 빠져나온 달빛이 베를레인 건물로 돌아가는 던과 메이의 등을 밀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