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식 Aug 27. 2024

고독한 폴리 베르제르의 바(2)

미술품 경매사 던의 이야기(3)

작가의 말 :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책을 읽는 경험을 많이 해보지 않았습니다. 읽고 있는 페이지가 아무리 흥미진진하다 하더라도 뒷부분에 대한 궁금증은 아직 발표되지 않은 입시 성적처럼 끊임없이 저를 괴롭힙니다. 천천히 현재의 장면을 즐기면서 읽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다 읽고 나서도 머리에 그럭저럭 재밌었던 책이구나 할 뿐, 작가가 담고자 했던 무언가에 대해서는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든요. 폴리 베르제르의 바는 3부작으로 쓸 예정입니다.


  


여러 종류의 할일 없는 새들이 동시에 지저귀고 그 소리에 메이가 빨간 소파에서 눈을 뜬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전 6시 40분, 정신이 서서히 깨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동시에 과음으로 인한 울렁거림이 시작되려 했다. 메이는 흘러내리는 딸기과즙 주머니의 작은 구멍을 황급히 손가락으로 막는 어린아이처럼 곧바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대로 눈을 뜨게 된다면 반나절은 숙취에 시달려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아직 2층의 냉장고를 뒤져보진 않았지만 해장을 할만한 음식이 있을 거라곤 생각되진 않았다. 어제 던과 같이 감정실에 들어와 각자 소파를 하나씩 차지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들었던 그림이 눈을 감은 메이의 앞에 펼쳐졌다. 좀전에 언뜻 주변을 보았을 때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소파 위에 던은 없었던 것 같다. 던이 자고 있나, 하고 눈을 다시 뜰 지 망설였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눈을 뜨고 던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면 바로 지독한 메쓰꺼움을 동반한 현실세계를 온전히 느끼게 된다.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두고 열어보지 않는 편이 좋다. 끊기며 흘러가는 꿈속의 한 장면으로 두자. 여기까지 메이의 감긴 머리속에서 산발적으로 의식적인 사고가 이어졌고 이내 다시 무의식의 세계로 진입했다.


메이가 다시 눈을 뜬 건 점심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소파 위에 던은 없었다. 그렇게 마셔놓고도 일찍 일어나다니 간이 불쌍하군, 라고 생각하며 던을 찾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만 한다. 사장의 말투나 톤의 분위기로 미뤄 봤을 때 500억을 넘기지 않아도 앞으로의 회사 생활에 있어서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내야만 한다.


베를레인 건물 2층은 베를레인 직원을 위한 5개의 객실이 복도를 따라 나란히 있다. 물론 2층의 객실을 쓰는 사람은 오로지 경매사 던뿐이다. 내부는 평범한 3성급 호텔의 방과 별다를 바 없다. 전파 수신이 되지 않는 티비와 케케한 냄새의 침대, 따뜻한 물의 수압이 유독 약한 샤워기만 빼면 말이다.


큰소리로 던의 이름을 외치며 모든 방문을 다 열어보았지만 던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갔나, 하고 우선은 샤워를 하기로 한다. 케리어에 들어있는 수건을 챙기러 다시 내려갔다올까, 고민했지만 어차피 섬에는 던과 자신 둘 뿐이다. 그냥 씻고 산책을 하며 햇빛에 자연스레 말리기로 결정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로 바로 뛰어들었다. 침대의 푹신한 감촉이 온 몸을 부드럽게 에워싼다. 점점 늪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이대로 눈만 감으면 다시 잠에 들 것 같다. 눈을 감고 얼굴을 배게에 파묻었다. 장마비에 젖은 신발을 그대로 방치해둔듯한 불쾌한 냄새가 났다. 곧장 몸을 일으켜 속옷만 입고 건물을 나가 포구 쪽으로 향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앞바다에 앉아 가만히 폐어선을 들여다 보는 던의 모습이 그려졌다. 드넓게 펼쳐진 초록빛의 논과 갈색 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밭, 얇은 슬리퍼 아래로 느껴지는 섬길의 모래돌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정된 느낌이다. 점점 수분이 증발하며 말라가는 피부 또한 그의 기분을 말랑하게 해주었다. 파도가 달리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고 시야의 절반을 차지한 녹색빛이 절반가량 푸른빛으로 대체될때쯤 폐어선이 눈에 들어왔다. 해를 띄운 바다의 경계로 향한 시야를 몸쪽으로 당겼다. 아니나 다를까 던은 그곳에 있었다. 제법 어울리는 그림이다. 20대 중반의 고독하고도 젊은 아트 경매사와 섬, 그리고 바다. 자신이 예술가였다면 당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더욱 친해지기 편했겠지. 설득 또한 마찬가지. 메이 나름대로 샤워를 하며 계획을 정리했다. 앞으로 7일간은 친해지는 작전이다. 되도록이면 고문이나 협박은 피하고 싶다. 물론 막바지에 다다르면 어쩔 수 었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어떤 조직에서든 가치가 없는 인간은 그 자체로 말소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증명해내야 한다. '소년 소녀의 신념을 짓밟아서라도 말이지'라고 생각하며 던에게로 향했다.


"언제 일어난거야?" 메이는 곧장 던의 옆에 앉았다.


"눈이 처음 떠졌을 때라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아요.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질 않거든요." 던은 말하는 동시에 머리를 잠시 어정쩡하게 숙였다. 아마 인사일 것이다.  말투가 어딘가 조금 아이스러워졌네, 라고 메이가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신호다. 의식적이든 자각하지 못했던 간에 자신을 한 명의 어른으로 바라본다는 뜻일테니까. 비록 속옷 한장만 입고 있어도 말이다.  


"보통 섬에 혼자 있을 때는 뭐하면서 시간을 보내?" 몸을 살짝 던에게 기울이며 말했다.


"하루종일 바다를 봐요.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이 나면 숲벽을 가고요. 그곳에 가면 충동을 억제할 수 있어요." 던이 대답을 하며 메이를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아무래도 속옷 한 장만 입은 그의 차림에 당혹스러운 모양이다.


"숲벽?" 메이가 고개를 돌려 반사적으로 물었다.


"건물뒤에 있는 숲을 말하는 거에요. 한 번도 가본 적 없어요?" 던이 말했다.


확실히 건물 뒤에 숲이 있었던 것 같다. 인상이 너무 희미해 숲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나무가 많았던 건 사실이다. 메이는 숲이라기엔 공원에 가깝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가본 적 없어. 궁금하네"


"이따 같이 가요. 혼자 가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같이 가면 도착하기 전까지 안심이 될 것 같아요. 혹시나 위협이 될만한 존재가 있어도 메이씨 앞에 나올 것 같진 않네요." 던이 신난 목소리로 말하고 다시 곁눈질로 거으  헐벗은 메이를 힐끔 본다.  


그런 공원이 무섭다니 아마 외로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모양이다. 하긴 저 나이 때면 그런 종류의 감정에 민감할 나이지. 몇 년동안 섬에서 나가지 않고 살았다. 거기다 대부분을 혼자 보냈다. 사람과의 교류가 그립지 않을 리 없다.  


"아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나면 공원을 간다고 했지? 아니 공원이 아니라 숲벽. 충동을 억제한다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도구가 없어서 그런거야?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나?" 메이가 다정하게 말했다.


던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말하기 싫으면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돼. 나중에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때 말해줘. 다만 섬에서 사귄 첫 친구의 작품을 못 본다는 건 아쉽군." 메이가 미소를 지으며 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친구...사무장님은...아니 메이씨는 저랑 나이 차이가 꽤 날텐데. 친구라뇨." 던이 말하고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친구에 나이가 어딨어. 나이가 신경이 쓰인다면 나에게 너의 젊을을 공유해줘. 나는 내 경험을 나누어 줄게." 메이는 고개를 돌려 던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씩 웃었다. "어제 술 마실 때는 그렇게 반말을 잘하더니, 이제 와서 이러면 서운하네"


"죄송해요. 분위기에 들떠서 그만. 그래도 위스키 바에 나와서 제대로 정중하게 말했던 기억이 있어요." 던도 메이를 따라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제 뭐 좀 먹으러 갈까? 배고프다. 먹고나서 너가 말한 공원...아니 숲벽에 가보자"


"좋아요" 던은 대답하며 블론드의 단발 소녀 소피를 떠올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