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글에 네가 없다 -
# C의 글 속에서…
우리 팀에 들어온 신입 작가 C.
내게서 일을 배우는 C는 글을 빨리 쓰는 편이다.
대신 정확도가 떨어져
일일이 문장을 짚어 가며 바로잡아 줘야 한다.
가령,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이 부자연스럽거나,
한 문장 안에 동의어가 두 개가 있거나,
앞에서 한 말을 뒤에서 재차 거론하기도 한다.
C가 대본을 빨리 제출할 때면,
불안해서 묻는다.
많이 검토하고 주시는 거죠?
네, 여러 번 검토했어요.
C에게서 열다섯 장 분량의 대본을 건네받는다.
하지만 첫 장을 쉽사리 넘기지 못한다.
곳곳에 엉성한 문장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길을 잃은 건지
문장이 배배 꼬여 있다.
사실 이런 식이면 뒷장은 읽을 필요가 없다.
이미 첫 장에서 모든 걸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제시해줘야 할 의무가 있어
마지막 장까지 검토하고 체크했다.
파악이 끝나고, C와 회의실에 들어갔다.
전체를 언급할 때가 아니었다.
부실하게 쌓아 올린 전체를 해체해서
기초석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글 한 줄에도 목적이 있는 법.
하나의 문장이라도 그 한 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부터 따지고 들었다.
목적이 파악되니, 그 목적을 잘 나타내기 위해
주어와 서술어는 어떠한 호응 관계를 이뤄야 되는지,
그리고 그 한 줄에 어떠한 단어를 배치해야
그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지,
세세하게 설정해 나갔다.
한 문단도 아닌,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해서.
한 줄, 한 줄을 잡고 씨름하니
당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문장력 향상을 위해선 거칠 수밖에.
1년 넘게 C에게 했던 말은
글의 정확도와 객관성에 관한 거였다.
글을 빨리 쓰려고 하지 말고
정확하게 쓰려고 해 보세요.
내 시각에서만 이해된 글을 쓰지 말고
다른 이의 시각에서도
이해된 글인지 체크하며 써 보세요.
에세이 같은 사적 영역의 글이라면,
그 누구의 이해를 크게 바라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공적 영역의 글은 공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위와 권력을 갖기 때문에
정확성과 객관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글이 가지는 권력이 악용돼선 안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고리타분한 사설을 C가 잘 이해해 줬다.
그리고 반복된 훈련의 효과였는지,
아니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에 질려서인지,
C는 예전보다 대본 검토가 꼼꼼해졌다.
문장력도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C글의 가장 큰 문제는 주제 전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불명확해서
산만하다는 거다.
C의 글을 읽어 내려가니 왜 산만해졌는지가 보였다.
선배들의 이 의견, 저 의견을 다 반영하다 보니
정작 자기 의견은 없는 글이 돼버린 거다.
아직은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며
직장 생활을 하는 신입 사원의 고충이
그의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럴 땐 C에게 묻는다.
이 주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결국 뭔가요?
내 질문에 말로는 잘 설명하는 C.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가 됐다.
말로 설명을 들으니까
이해가 잘 되네요.
근데 어쩌죠?
글에는 그게 안 나타나 있어요.
내 피드백을 받고서,
C는 그제야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이 방향으로
주제를 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선임 편집자가
계속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거예요.
저는 아직 신입이라
제 생각에 확신이 없으니까
저보다 경력 많은 선임의 말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일단 선임의 말을 듣고 그 방향대로 풀어본 거는
헛수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땐
어느 쪽으로든 해보고 결과를 확인해 봐야
뭐가 맞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동일한 상황이 주어질 때,
C는 어떤 선택을 해야 될지
이제 알게 된 거다.
필요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참고하는 건 좋지만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야 돼요.
이 글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C님의 거예요.
선임의 것이 아니에요.
그게 개똥철학이라도
본인의 생각을 담아야 돼요.
안 그럼 이도 저도 아닌
정체불명의 글이 될 거예요.
당장은 적용하기 어려운 이말 저말을
참 쉽게도 내뱉었다.
그래도 C가 이 말을 새겨듣고 노력한다면
언젠간 C의 글 속에서
C가 오롯이 서게 될 날을 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