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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Dec 14. 2024

도반-5

연재소설 <블랙홀>

시나브로 식당주인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한참인데 우리가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식당주인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무척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도반이 식당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식당주인이 ‘육만삼천원입니다.’ 하고 말하자 나는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슈퍼에서 뭣 좀 사 가자.”


내가 술에 절어 검붉어진 얼굴로 철면피처럼 말했다. 도반이 만 원짜리 한 장을 내 손에 쥐여 주고는 먼저 모텔로 들어갔다. 나는 슈퍼에 들러 소주 한 병과 구운 계란 세알, 캔 맥주 하나를 샀다. 그것들을 검정 비닐봉지에 담고 슈퍼를 나서는데 갑자기 두개골 안쪽이 띵했다. 유월의 뙤약볕이 정수리에 제대로 박힌 모양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모텔 계단을 올라 옥탑방에 들어섰다. 도반은 선풍기를 틀어놓고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슈퍼에서 가져온 검은 비닐봉지를 풀어놓았다.


“한잔하고 자자.”


소주병을 따고 도반을 불렀다. 도반은 얼마나 피곤했는지 말도 하지 못하고 손만 힘없이 내젓더니 잠시 후 미끄러지듯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는 종이컵에 소주를 붓고 계란을 안주 삼아 음주수행에 들어갔다. 


지난밤 술에 찌든 몸을 아침에 해장술로 무감각하게 만들고 또다시 점심에 음주하였으니 강철인들 견뎌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따를수록 고행은 무르익고, 나는 점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로 치달리고 있었다. 결국 소주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내가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밤 아홉 시쯤이었다. 비몽사몽간에 들여다본 액정엔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 가까이 와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부재중 전화로 인해 정신은 명료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앞으로의 일을 수습할 생각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어제저녁 일곱 시에 집을 나섰으니 만 하루하고도 두 시간이나 지난 터였다.


“속은 괜찮냐?”


도반이었다. 내 기척에 잠을 깬 모양이었다. 나는 죽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동 한 그릇 할래?”


“돈 있냐? 아까 낮에 다 써버렸잖아.”


“보자. 돈이 얼마나 있나?”


도반이 주섬주섬 호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천 원짜리 한 뭉치가 나왔다. 침을 튀겨가며 세어보니 딱 열 장이었다. 


“한 그릇씩 먹을 수 있겠다. 내려가자. 버스터미널 앞에 우동 잘하는 집 있어.”


“그냥 배달시켜. 나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


나는 고개를 푹 꺾은 채 말했다. 누군가 와서 때려죽인다 해도 그냥 맞아 죽고 말지, 안 죽으려고 막을 힘도 일어설 힘도 없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배달을 하냐. 중국집 문 다 닫았다. 지금 가려는 데는 냄비우동 집이야.”


“미안하네. 자네 혼자 먹고 오게.”


나는 다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속 좀 풀고 집에 가야지. 내일 출근은 안 할 거야.”


도반의 회유 섞인 말에 불현듯 갈등이 생겼다. 몸은 그대로 있으려 했지만 정신이 꿈틀거리며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집에도 가야하고, 가서 아내에게 사과와 유감의 뜻을 표해야 하고, 몸을 추슬러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래,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동 집에 가보자.”


나는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이, 삼 분 거리에 있는 버스터미널 앞 우동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간판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이었다. 


“아참, 오늘 일요일이지? 이집 교회 가는 날에는 문 안 열어.”


도반이 앞장서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푹 꺾은 채 도반의 뒤를 따라 김밥체인점으로 들어섰다. 누가 보면 앞 사람에게 끌려가는 포로 같은 모양새였다. 홀 안에는 젊은 남녀 한 쌍이 라면에 김밥을 먹고 있었다. 교외에 놀러 갔다 돌아온 듯 가볍고 화사한 꽃무늬 옷차림이었다. 문득 오만상을 하고 있을 내 꼬락서니가 궁금해졌다. 나는 담담하게 거울 앞에 멈춰 섰다.


“우동 둘요.”


도반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흡사 노숙자와 같았다. 흐리멍덩하고 누리끼리한 눈동자에 푸석푸석한 얼굴, 게다가 면도를 하지 못해 덥수룩하게 자라난 수염으로 여지없이 노숙자를 방불했다. 나는 한없는 비애감을 느끼며 도반의 앞으로 가 앉았다.


사천 원짜리 우동 두 그릇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나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고춧가루부터 뿌렸다. 하지만 막상 먹으려고 하니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온몸의 진이 빠져버린 상태라 젓가락질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어금니로 씹는 것은 또 오죽하겠는가. 나는 흩어지고 방출된 기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일 도리밖에 없었다. 


반면에 도반은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우동을 먹고 있었다. ‘후루룩’ 소리가 경쾌하게 났고, 간혹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 손길도 날렵했다. 면발 한 젓가락에 단무지 반쪽의 공식을 철저하게 지키며 도반은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직 반도 비우지 못한 우동그릇을 붙안은 채 끙끙대고 있었다.


도반이 정수기 물을 떠 오는 동안 나는 우동과의 사투를 그만둘까 생각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다짐하면서 약해지려는 나 자신을 옥좨서 북돋웠다. 이 돈이 어떤 돈인가. 도반의 피 같은 돈이 아니던가! 나는 음주수행의 정신을 되살려 고행 속에서도 기어이 우동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내고야 말았다. 내 온몸은 땀으로 범벅되었고 성취감과 안도감에 피로가 몰려들었다.


우리는 김밥체인점 밖으로 나왔다. 늦은 밤 터미널 앞에는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수은등을 환하게 밝혀두고 시외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다수 사람은 노점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귀가를 서두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도로변에는 승객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는데 간혹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도 눈에 띄었다. 도반이 맨 마지막에 정차해 놓은 택시 쪽으로 다가갔다.


“형님. 오늘 많이 벌었어요?”


도반의 말에 택시기사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 미안한데요. 내가 가진 게 딱 이천 원뿐인데 우리 친구 좀 태워주세요. 모자라는 돈은 다음에 줄게요.”

택시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반이 호주머니에서 마지막 남은 이천 원을 꺼내 들었다. 나는 진짜 벼룩의 간을 빼먹은 놈으로 낙인찍히겠다 싶어 도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됐어. 나 걸어갈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도반이 큰 소리로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어가냐며 나를 끌고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택시기사 보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 채 뒷좌석에서 몸을 말았다. 그렇게 나는 귀가했고, 이튿날 출근했고, 거의 한 달 동안 근신했다.


그러면서 빌드업하듯 조금씩 술에 대한 자신감을 끌어올린 나는 스스로 근신을 풀고 음주활동을 재개했다. 처음 며칠 간은 무척 조심스러웠는데 어젯밤에는 긴장감이 떨어졌는지 동료 형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취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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