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블랙홀>
“술이란 게 자네도 알다시피 처음엔 즐거움을 주지만 이후엔 고통을 준단 말이야. 육체와 정신, 가정과 직장생활, 그리고 경제적 압박까지, 술로 인한 고통은 넓고 깊게 자리하거든.”
“그렇지.”
“그런데도 다시 술을 입에 대고 스스로 고행에 들어서는 게 바로 도반의 모습이라는 거지.”
“보기에 따라선 수행자가 아니라 알코올중독자로 보일 수도 있겠는데?”
“음주수행자와 알코올중독자 사이의 거리는 사실 한 뼘도 안 돼.”
나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도반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잔을 채워주었다.
“영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네틀이 쓴 ‘성격의 탄생’이란 책이 있어. 거기서 저자는 인간의 성격을 외향성, 신경성, 성실성, 친화성, 개방성 이렇게 5가지로 나눠놨지. 내가 말하려는 건 개방성인데, 이게 뭐냐 하면 ‘문화성’, ‘지성’ 혹은 ‘경험에 대한 개방성’ 등으로 불리기도 하고, 또한 독창성, 예술성과도 관련이 있어.
개방성이 높은 부류는 시인이나 예술가 집단이야. 이들은 서로 다른 인식영역들이 개방되어 자유롭게 소통 가능한데, 바로 광범위한 인식 및 연상 능력이 있다는 게지. 또 개방성에는 영적인 부분, 초자연적인 믿음도 존재해.
그러니까 시인들만 개방성이 높은 게 아니라 무당이나 주술사도 마찬가지지. 광범위한 연상에다가 주기적으로 환청을 듣거나 특이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저 우주의 중앙컴퓨터에 접속했다고 느낄 정도로 접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야. 그리고 개방성이 높은 사람은 규범과 인습에 대하여 부단한 저항을 하지. 어때? 문학, 예술 하는 사람들 대부분 체제 순응을 잘 못 하잖아.”
“그렇지. 반체제인사라 하기엔 너무 나갔고, 사회부적응자라 하기엔 너무 비하한 거고.”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개방성이 높으면 정신질환자가 될 가능성 역시 큰데, 정신분열증 환자의 개방성 수치가 시인, 예술가, 종교인, 무당, 주술사 등과 비슷하다는군.”
“정신분열증을 앓으면서도 11년 만에 시집을 내고 활동 재개한 최승자 시인이라고 있지.”
“정신분열증 환자는 시인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시인이 정신분열증을 앓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아. 환청, 텔레파시 같은 신비롭고 독특한 경험에 대한 수치는 시인이나 정신질환자나 높게 나오거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노장사상, 점성술 등 신비주의 공부에 빠진 것이 계기였다더군.”
“시인이나 예술가의 신비롭고 독특한 경험은 정신분열증 증상 중 비정상적인 생각이나 믿음과는 관계가 있지만, 정신분열증의 다른 증상인 감정적 단조로움, 사회적 고립, 동기의 결여 등과는 관계가 없다 그래. 다시 말하면 정신질환자는 감정이 단조롭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동기부여가 안 된다는 걸 알려주는 거야. 여기에 시인과 정신질환자의 중대한 차이가 있는 거지.
내 생각을 덧붙여 보자면 시인은 정신질환자와 같이 독특한 경험을 가지지만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그걸 작품이든 뭐든 형상화하고, 반면 정신질환자는 독특한 경험에 함몰되어 현실과 초현실을 스스로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야.”
나는 소주로 입을 축이고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같은 술꾼을 일반인이 볼 땐 수행자인지 중독자인지 헷갈릴 거야. 아니 주야장천 폐인처럼 술을 퍼마시는 우리를 알코올중독자라 그러지, 누가 수행자라 하겠냐.”
“수행자라 그러면 궤변 정도가 아니라 정신병자 취급하겠지. 중독자라 그러면 최소한 네 꼬락서니는 아는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일 테고.”
“다시 대니얼 네틀의 개방성을 들여다보자고. 개방성이 뛰어나면 시인이 될 수도 있지만 정신질환자도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술을 많이 마시면 수행자일 수도, 중독자일 수도 있어. 그럼 어느 경우에 둘의 구분이 가능하냐? 그건 정신분열증상의 감정 및 동기와의 관련, 스스로에 대한 객관화 능력을 꼽을 수 있겠지.”
도반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음주수행자에게는 동기가 있어. 음주란 게 처음엔 즐거움과 쾌락이 있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과 고행이 뒤따르지. 일반인들은 여기서 음주를 그만두지만 수행자는 이제부터 시작인 거야. 고행으로 자신을 학대하다 보면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극단의 세계,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서는 거지.
그러면 스스로가 객관화되면서 자아가 명료하게 드러나고 뒤틀린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는 거야. 술에 만취되면 가슴에 묻어둔 얘기를 한다든지, 꺼이꺼이 통곡한다든지 그러잖아. 그러고 나면 영육이 개운해지지. 마치 폭풍우가 휩쓸고 간 사바나의 초원처럼 말야.”
나는 소주로 목을 축였다.
“하지만 중독자는 몸의 생체리듬이 알코올에 맞춰져 있는 거라 일반인들처럼 희로애락 감정 때문에 음주하는 동기 따위가 있을 리 없고, 항상 술에 절여 있어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며, 그러다 보니 음주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 그냥 무대포로 술 마시는 거야.”
도반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잔을 채워주고 계속 말을 이었다.
“시인이 술을 많이 마시는 이유가 우선 한 고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창작의 고통을 달랜다는 것. 창작의 질료를 찾는다는 것. 특히 창작의 질료를 찾으려면 어디 우주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하는데 그게 맨정신으로 가능하냐?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정도로 술에 떡이 되어야 하고 개가 되어야 하고 필름이 끊겨야 하고, 그래서 결국 무의식의 세계를 경험해야 하는 거지. 거기서 질료가 얻어지고 새롭게 창작을 할 수 있는 거지.”
“중요한 건 이제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는 거야. 쓸 생각도 없고.”
도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불판 위의 고기는 식어 외면당하고 있었고 소주병만 우리의 관심을 받을 따름이었다.
“의식은 시를 안 쓴다고 할지라도 자네의 무의식이 시를 쓰겠다면 어쩔 건데? 지금 시를 쓰고 안 쓰고 간에 그게 도반을 결정짓는 구분이 될 수 없네.”
도반이 잠자코 고개를 떨어뜨려 술잔을 응시했다.
“자넨 정말 용맹정진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믿어. 모든 걸 내려놓고 희생시키고, 수행에 임하는 자네는 내 롤모델일세.”
도반은 음주수행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아니 모든 게 한없이 내려앉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정진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음주수행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반은 이혼이란 이름으로 소중한 가정을 내려놓았다. 역시 같은 이름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과의 이별도 불사했다. 마치 성철 스님이 용맹정진을 위해 출가를 했던 것처럼.
그리고 도반은 집도 절도 없이 모텔 옥탑방에 산다. 가진 것 없고 돈은 더더욱 없다. 없으면 굶고, 있으면 먹는다. 그러나 술은 수행을 위해 필요하니까 그럴 수도 없다. 그럴 땐 택시 일을 나간다. 그리하여 일용할 술을 탁발해 온다.
도반과 비교해 나는 어떠한가. 아내의 잔소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조심조심 살얼음판을 걷듯 아주 소심하게 수행한다. 워낙 몸을 사리다 보니 음주세계에서 복지부동이라 손가락질을 당한다. 가끔 통음에 들어서면 가정도 처자식도 잊어버리고 정진하지만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 체력이 떨어져 수행을 중지하는 순간 나는 속세의 장삼이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