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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Nov 23. 2024

도반-2

연재소설 <블랙홀>


도반에게 ‘술빚’을 지게 된 건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벗글 오총사의 멤버인 오종탁을 만나 통음을 하게 되었다. 통음은 술 앞에서 자유를 맘껏 구가하는 도반 같은 친구와 함께할 때 가능한 일이었지 오종탁과는 거리가 먼 이벤트였다. 오종탁은 아내에게 삼세번 전화가 오기 전에 먼저 술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공처가였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배짱이었는지 아내가 세 번째 전화해 오자 배터리를 빼버리는 것이었다. 


오종탁과 나는 해장국 집에서 끈질기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근무 교대를 하는 시간이자 환경미화원이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녘이었다. 그 시각에 귀가했다간 아내에게 온몸이 쥐어 뜯어질 거라 판단한 우리는 소주 두 병을 사서 근처 모텔로 기어들었다. 그리고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 아까 했던 이야기 또 하면서 기어코 소주 두 병을 다 마시고 나서야 정신을 잃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침 아홉 시였다. 방 안 가득 술 냄새가 진동했고 온몸이 숙취로 나른했다. 그런데 옆에 누워있어야 할 오종탁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아내에게 백기 투항하러 일찍 모텔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문득 처가에 가야 할 일이 생각났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아내는 콩 심으러 친정에 가야 한다며 세뇌하듯 선약을 잡아놓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지금 귀가했다가는 완전 초주검이 되겠다 싶었다.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려서 살길을 모색해 보았다. 이대로 정신을 차린 채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한껏 취해서 귀가하는 편이 아내의 예봉을 막아내는 데 유리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데도 심신미약 상태가 참작되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만취해 있으면 아내가 즉시 공격하지 못하고 술 깰 때까지 보류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세수만 하고 서둘러 모텔을 나섰다.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도반을 떠올렸다. 도반과 나는 술자리에서 언제나 술지게미처럼 마지막까지 남아 우애를 과시하곤 했는데 몇 달 전 내가 참다 참다 결국 절교를 선언해버렸다. 도반은 이혼한 이후로 술만 마셨다 하면 남의 성질을 긁어대는 고약한 버릇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명 주사(酒邪)가 있는 술꾼이라서 도반은 어지간히 친했던 사람에게서도 만남을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취하면 기분 좋아지는 것이야말로 음주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데 도반은 (근본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나) 취했다 하면 오만상을 찌푸리고 불평불만을 공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술자리 동석자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혼자만 역경과 고난의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언행이 거칠고 짜증스러웠다. 


게다가 술을 마셨다 하면 연이틀 음주는 기본이고 종종 근무 중인 사람에게 전화해서는 취한 목청으로 대뜸 술 마시러 나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이에 상대가 ‘대낮에, 그것도 한창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술이냐’고 화를 내면 오히려 쌍욕을 퍼부으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무례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나는 도반에게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며 호통쳐서 절교를 선언한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도반의 전화번호를 수신 거부로 등록해 버렸다. 그랬더니 한동안 줄기차게 걸려오던 전화가 언제부턴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문득 도반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요즘 들어 이틀 연속 마시는 처지다 보니 도반의 주사를 탓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숙취 기운을 빌어 지체없이 도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으나 도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가 절교를 선언한 이후 그의 전화를 일절 받지 않았으니 도반 역시 내 전화를 안 받는 게 하등 이상할 건 없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오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넉 장이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나는 근처 해장국집에 들어섰다. 전날의 주독이 빠지지 않은 얼굴로 더욱이 혼자서 콩나물국밥과 막걸리를 주문하려니 뒤통수가 뜨뜻했다. 누군가 지독한 술꾼이라고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술독에 몸을 더 담가야 내가 살겠기에 창피함은 참고 견뎌야 했다. 


잠시 TV에 눈을 붙이고 있으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이 탁자에 올라왔다. 군침을 돌게 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구역질이 올라오면서 속으로 잘 넘어가지는 않았다. 반면에 막걸리는 안 넘어갈 것 같았는데 의외로 술술 잘도 넘어갔다. 식당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피가 얼굴에 몰린 듯 화끈거렸는데 한잔을 마시고 나니 피가 더 쏠리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두 번째 잔을 탁자 위에 소강상태로 내버려 두었다. 그 사이 휴대폰 벨이 울렸다. 놀랍게도 도반이었다. 


“어이 김 형사, 어쩐 일이야.”


도반의 목소리가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밝았다. 수신 거부의 시간일랑 염두에 두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술잔을 나누고 싶어 전화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도반은 나의 주둔지를 확인하더니 지금 바로 자신의 주거지와 가까운 버스터미널 앞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막걸리가 많이 남아있어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형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도반은 거두절미하고 단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들고나와.’


나는 콩나물국밥은 그릇째 손도 대지 않은 그대로 놔두고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달라고 해서 막걸리 통을 넣어 밖으로 나왔다. 오전 열 시가 넘어서니 유월의 햇볕이 제법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터벅터벅 걸어 버스터미널 앞으로 갔다. 


“이야, 김 형사. 반갑다.”


작은 체구에 커다란 얼굴과 은테 안경, 그리고 풍성한 꽃무늬 셔츠 차림의 도반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왼손으로 옮기며 반갑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시는 연락 안 할 줄 알았는데.”


도반의 얼굴에서 원망과 반가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자네는 이제 단순한 술친이 아니라 도반이니까.”


“술친? 뭐 절친 같은 건가. 그럼 도반은 또 뭐냐?”


“그건 이따 회포를 풀어가면서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자네 집 구경부터 하세.”


“집은 무슨. 그냥 방이지.”


도반이 손사래를 치며 술집으로 직행하길 원했지만 내가 한사코 우겨 그의 방을 찾아갔다. 모텔 옥상의 옥탑에 판넬을 붙여 달아낸 자그마한 가건물이 도반의 방이었다. 수돗물을 받아 쓸 수 있는 세면장과 방 하나가 전부였다. 방에는 소형 냉장고, TV, 옷걸이, 침대가 놓여있었다. 


“좀 덥다, 이해해라.”


도반이 선풍기를 틀며 겸연쩍게 웃었다. 모텔에 달방을 구해서 묵고 있다 하면 당연히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겠다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에어컨 없냐?”


내 입은 머리와 따로 놀며 눈치 없는 질문 하나를 툭 던졌다.


“옥탑방이라 에어컨이 없어서 방값이 좀 싸다. 그만 나갈까.” 


“잠깐만. 가져온 막걸리나 한잔하고.”


내가 검은 비닐봉지를 주섬주섬 풀자 도반이 손사래를 치며 ‘막걸리는 식당 가져가서 먹자’고 타일렀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어디 갈 거냐고 물었고 도반은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되물었다. 이에 나는 먹고 싶은 거야 많은데 지금 가진 돈이 없다고 말했고, 도반은 오늘은 자기가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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