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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Nov 16. 2024

도반-1

연재소설 <블랙홀>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온 이희수는 커피믹스 한 잔을 타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탁자 위에 백상호가 두고 간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호기심에 책자의 표지를 넘겨보았다. 내지 상단에 단편소설 도반, 그 아래쪽에 저자 김석규라고 고딕체로 찍혀있었다. 이희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천천히 소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일어나보니 아침 일곱 시가 지나있었다. 지난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비몽사몽 간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내는 겨우 돌 지난 딸 지우를 업은 채 양손 가득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중이었다. 아내의 구시렁대는 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내 뇌리를 휘저어 놓았다. 


“여보. 그냥 가면 어떡해. 나 데리고 가야지.”


평소 아내의 차를 타고 출근하는 처지라 사정을 해보았지만, 아내는 현관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지우를 처형댁에 맡겨야 했기에 아내의 출근은 항상 이른 시간에 시작되었다. 


“정우야. 엄마 화 많이 났냐?”


“몰라!”


얼마 전 여름방학을 맞은 아들 정우는 TV에 시선을 붙여두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내의 행동은 당연히 그럴 만했다. 나는 자체 금주령 발동 후, 한 달 만에 음주를 재개하면서 어제 처음 만취 상태로 귀가했다. 엄청난 일을 벌인 것이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여의치 않아 드러누운 자리에서 다시 곯아떨어졌다. 


재차 눈을 떴을 때 시간은 거의 아홉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 출근 준비를 서두르면서 어제 입었던 바지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달랑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있었다. 술꾼의 백지수표인 신용카드는 이미 아내에게 압수당한 지 오래였다.


“정우야, 돈 좀 있냐?”


“내가 돈이 어딨어? 용돈 얼마 주지도 않으면서.”


정우의 핀잔에 나는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서랍을 뒤적거렸다. 정우 통장에 저금하려고 아내가 넣어둔 삼만 원이 있었다. 나는 그걸 챙겨 아파트 정문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숨이 턱까지 차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는 기사에게 중앙동으로 가자고 일렀다. 택시가 경쾌한 엔진음을 내며 말티고개를 넘어갈 때 나는 술 냄새가 날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진짜 요즘처럼 택시 어려운 적 없어요.”


택시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짐짓 못 들은 척하며 침묵을 지키려 했으나 그만 시선을 마주치고야 말았다. 택시기사가 신호대기 중인 틈을 타서 말을 이었다.


“택시 해서는 밥 못 먹어요.”


“그렇죠? 우리 형과 친구도 택시 하는데 사납금 넣기도 힘들다 하더라고요.”


나는 술 냄새 때문에 조심한다고 했건만 엉겁결에 그만 대화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저는 투잡합니다. 건강보조식품 말이죠.”


“아, 전에 우리 형도 겁외사에서 홍화씬가 뭔가 팔곤 했는데.”


“제가 직접 파는 게 아니라 사무실에서 영업사원 관리만 합니다.”


“그럼 사장님이시군요.”


“뭐, 꼭 사장이랄 수는 없지만. 하하, 그러고 보니 사장이군요.”


택시기사가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나는 남아있는 술기운의 영향으로 무장해제 되어 오히려 먼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이어갔다.


“사업은 잘되시나요?”


“어휴, 안 돼요. 처음엔 삼백, 사백씩 들어왔는데 요즘엔 일, 이백도 힘들어요.”


“그럼 사무실 임대료 내며 운영하기도 빠듯하겠군요.”


“처음엔 직원들 밥을 식당에서 사줬어요. 한 끼에 열 명이면 거의 십만 원이죠.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엔 부담되더라고요. 그래서 사무실에서 밥을 해 먹을 수 있게 만들었죠. 싱크대 들이고 가스레인지 들이고.”


“사장님이 그럴 정도면 영업사원은 진짜 힘들겠군요.”


별안간 내 오지랖이 발동했다. 택시기사 걱정해 주다가 뜬금없는 영업사원 걱정이었다. 


“그 사람들도 투잡하죠. 보험하면서 이거 하는 사람 있고, 또 시골 이장도 있어요. 농사지으면서 영업하죠.”


“영업 잘 안 되거나 하면 사무실에 죽치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네요?”


“그래서 에어컨을 안 넣잖아요. 시원하다고 아예 온종일 앉아있으면 전기료 감당 안 돼요.”


기사가 대단한 아이디어인 것처럼 반색하며 말했다.


“술도 많이 마시겠군요.”


“그럼요. 어제도 택시 마치고 오전에 사무실 나가보니까 이장이 족발을 사 와서는 술 한 잔 하자더라고요. 물건값 오십만 원이 아직 미납 중인데 무슨 돈으로 술을 사 왔냐고 하니까 글쎄 내게 부탁할 게 있다는 거예요. 한 마디로 뇌물을 좀 쓰겠다는 건데, 대뜸 외상으로 물건 오십만 원어치만 더 달래요. 그걸 팔면 백만 원을 손에 쥘 수 있거든요. 딱 두 배 장사라.”


“그래서요?”


“안된다고 그랬죠. 물건 외상으로 가져가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요. 특히 술 먹는 사람한테는 더더욱 그렇죠. 술 먹으면 사실 영업 안 하거든요. 그리고 외상 물건 팔아서 그 돈으로 대개 술 먹는데 써버려요.”


택시기사의 말에 마치 내가 술꾼들의 대표나 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혹시 술 냄새가 운전석에까지 풍길까 봐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택시가 경찰서에 도착하기 전 나는 미리 택시비를 지불하고 우체국 앞에서 하차했다. 


“김 형사. 오늘 술 냄새 많이 나는데 하루 쉬는 게 어때.”


임용 동기인 팀장이 말했다. 여섯 명이나 되는 동기 중 승진을 못 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상관에게 입바른 소리를 한다는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잦은 폭음으로 인한 근무 태만이 승진에 발목을 잡고 있었다. 


팀장은 숙취에 따른 나의 행동 패턴을 예상해서 미리 선수를 친 것이었다. 나를 사무실에 놔뒀다간 점심시간에 해장해야 한다며 술을 마실 테고, 그렇게 발동이 걸리면 아예 식당에 죽치고 앉아서 동료형사들을 차례로 불러내어 사무실 일을 마비시킬 게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럴까? 동료들 보기도 그렇고, 나도 많이 피곤하네.”


나는 연가를 내고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정문 근무를 서는 낯익은 의경 하나가 말 안 해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나는 천천히 정류장으로 걸어가서 가장 먼저 도착한 시내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텅 빈 시내버스의 뒷좌석에 앉아서 얼떨결에 얻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했다. 


집으로 갈까? 집에 가면 정우가 엄마에게 고자질할 테니 무마용 당근이 필요했다. 점심때 짜장면 한 그릇 시켜주면서 비밀 지켜 달라 그럴까? 난 막걸리 한 통 들고 가서 마시고. 술 앞에선 체면도 없다는 말처럼 유치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시내버스가 제 딴에는 열심히 달린다고 달렸지만 정류장마다 정차하느라 평균속도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도반(道伴)에게 전화해 볼까?’


문득 도반이 뇌리를 스쳤다. 도반은 ‘벗글 오총사’ 중의 하나인 백상호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본격적인 문학인의 길을 걷기 위해 택시를 시작했다. 택시는 생계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인간에 대한 관찰과 탐구를 해보기에 제격이었다. 낙선한 정치인들도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종종 택시기사를 자처하지 않던가. 하지만 문학은 뜬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백상호에게 남은 이름은 생계형 택시기사였다. 


도반과 나는 술 앞에서만큼은 좌고우면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둘이 만났다 하면 으레 만취했다. 그래서 아내는 도반과 내가 어울리는 게 징글징글하다며 몹시 싫어했다. 나 역시 아내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 아니어서 가급적 아내 앞에서는 도반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어느 날 아내가 ‘술빚’에 관한 일화를 듣고는 도반에게 갚아주라며 쾌히 한 번의 만남을 승낙했다. 그래서 아껴두었던 그 카드를 오늘 한 번 써보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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