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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Nov 09. 2024

술과의 전쟁 - 6

연재소설 <블랙홀>

박미옥이 뒤늦게 과일과 식수 보급로를 확보해서 지원에 나서 보았지만, 김석규는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며 처참하게 무너졌다. 결국, 거실 바닥은 김석규가 고주망태의 온몸으로 그린 큰 대자가 차지하고 말았다.


이튿날 김석규는 기상 시간이 지났는데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마침 부산 서면의 한 예식장에서 열리는 조카 결혼식에 가야 하는 날이었다. 더욱이 강주에서 참석하지 못하는 친지들의 축의금 봉투를 몽땅 걷어서 대표로 참석하겠다고 큰소리를 땅땅 친 연후였기에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가야만 할 길이었다. 박미옥이 도끼눈을 하고 얼음장 같은 손으로 깨우자 김석규는 패전의 후유증에 끙끙 앓아가며 가까스로 정신 차렸다.


김석규가 간신히 부산까지 운전해 와서 예식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타워에 들어섰을 때였다. 불현듯 전쟁후유증으로 일컬어지는 과호흡 증후군의 전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필이면 박미옥이 딸 지우를 데리고 화장실에 간 사이였다.


과호흡 증후군이란 산소의 과다 공급으로 몸 안에 이산화탄소가 부족해져서 생기는 병이었다. 증세로는 호흡곤란에 사지 마비가 오고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었다. 스트레스와 불안 심리가 주요인이긴 하지만 격렬한 전투 등으로 몸이 피폐해질 경우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김석규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누며 호흡량과 횟수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숨을 참아 산소의 유입을 막으면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이 적정하게 조절되면서 증상이 호전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 몸이 그렇게 교과서적으로 작동되지만은 않았다. 호흡을 줄이려 할수록 불안감이 커지면서 숨은 막힐 것 같고, 그렇다고 마음대로 숨을 쉬자니 오히려 산소량이 많아지면서 마비가 올 것처럼 몸이 뻣뻣해졌다.


만약 결혼식장에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석규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119 구급대원들이 요란하게 진입한다면 남의 결혼식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김석규는 어린 시절 멱 감을 때 누가 제일 오래 물속에서 숨을 참는지 내기하는 것처럼 한번 버텨보기로 했다.


하지만 김석규의 폐활량으로는 금세 숨통을 틔우지 않을 수 없었다. 호흡해도 호흡하지 않아도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김석규는 조난된 사람이 음식물을 아끼듯 그렇게 조금씩 호흡을 아껴가며 숨을 쉬었다.


이윽고 박미옥과 지우가 화장실을 다녀왔다. 김석규는 왜 이렇게 늦었냐고 화를 낼 기력도 없을 만큼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그렇다고 과호흡 상태를 알릴 수도 없었다. 그건 본전도 찾지 못할 어리석은 짓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어제 미친 군인처럼 미친 군인의 노래를 부를 때 알아봤어.’


박미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김석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핏기없는 얼굴로 승강기에 올랐다.


김석규가 하객들로 붐비는 로비를 지나 혼주와 신랑에게 인사를 건네고 접수대에 축의금 봉투를 한 무더기 쏟아놓은 후 예식장 안으로 들어서자 과호흡 증후군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김석규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경직되어 정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누며 식장 뒤쪽 좌석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앉아있었다.


박미옥이 인상을 북 쓰며 눈치를 하더니 급기야 허벅지를 꼬집었다. 김석규가 마지못해 자세를 고쳐 앉긴 했으나 다시 무너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석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박미옥에게 비닐봉지 가진 거 있냐고 물어보았다. 과호흡 증후군의 응급조치로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본인이 내뱉은 이산화탄소를 도로 마셔서 산소포화도를 낮추는 방법이 있었다.


박미옥은 찢어지게 눈을 흘기면서도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은행통장 비닐커버를 내밀었다. 김석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걸 벌려 입에다 대고 조심스럽게 호흡을 시도했다. 하지만 비닐봉지만큼 내뱉은 숨을 충분히 담지 못해 호흡은 자꾸 거칠어지고 가슴은 꽉 조이듯 경직되는 것이었다.


예식이 끝나고 사진 촬영이 있다는 사회자의 말에 김석규는 비닐커버를 입에 댄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미옥이 만면에 웃음 대신 인상을 북북 쓰며 지우를 데리고 따라 일어섰다. 김석규는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뷔페를 건너뛰었다간 두고두고 바가지를 긁히겠다 싶어 죽을힘을 다해 식당으로 허적허적 걸어갔다.


뷔페에는 적들이 연합군 동맹을 과시하며 주둔해 있었다. 김석규는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적진 속을 걸어 들어갔다. 당장 포로로 잡힌다 한들 어찌해볼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고 적에게 대항할 엄두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김석규는 패잔병처럼 쪼그라든 몸으로 적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하지만 거기서도 적들은 탁자를 점령한 채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김석규는 적들의 사주경계에 포착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역전의 용사 체면에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노릇이었지만 우선은 살고 볼 일이었다.


김석규가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는 한 적들도 먼저 도발하는 일은 드물었다. 비교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남북관계라고나 할까. 도발이 있으면 반사적으로 응징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지만 먼저 도발하지 않으면 서로 경계만 강화했지 병력이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오늘은 과호흡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이라 김석규가 먼저 적에게 총부리를 겨눌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김석규는 음식을 챙겨온 박미옥에게 비닐봉지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통장 비닐커버 만으로는 과호흡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미옥이 한없이 깊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뷔페 입구로 가 안내원에게 비닐봉지를 부탁했지만, 안내원은 매우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석규는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비닐커버를 코와 입에 야무지게 대고 거칠게 호흡을 했다. 옆 탁자에 앉은 사람들이 힐끔힐끔 이상한 눈빛으로 김석규를 쳐다보았다.


박미옥이 죽 한 그릇을 가져와 김석규 앞에 탁, 내려놓았다. 김석규가 죽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한 숟갈을 떠서 입에 넣어보았다. 하지만 죽 한 모금은 입안에 맴돌 뿐 식도를 향하지 못했다. 이 부드러운 죽마저도 목구멍을 막아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김석규는 가족의 식사 시간만큼은 최대한 보장해 줘야 한다는 생각에 직접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입구의 안내원을 찾아갔다. 안내원은 마치 경호원처럼 검은 정장 차림에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 있어요?”


안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팩이라도 없어요? 하다못해 종이 가방이라도.”


“그런 거 없습니다.”


안내원이 딱 분질러서 말했다. 김석규는 음식물을 싸서 갈 봉지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응급처치를 위한 거라고 사정을 하고 싶었지만, 안내원의 냉소적인 얼굴을 보고는 자괴감이 들어 그냥 돌아섰다. 김석규가 표정을 한껏 찌그러뜨려서 자리에 돌아왔지만, 박미옥과 지우는 걸신들린 것처럼 음식을 맛나게 먹고 있었다.


“더는 못 참겠다, 나 먼저 차에 가 있을게.”


김석규는 더이상 가족을 배려할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뷔페를 나서자마자 정신을 잃고 로비의 카펫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안내원이 흉부 압박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며 119구급차량을 불렀고, 다행히 김석규는 자가 호흡을 되찾아 신속하게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거기서 그는 알코올성 편집증 소견을 받아 정신병원으로 다시 이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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