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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Nov 02. 2024

술과의 전쟁 - 5

연재소설 <블랙홀>

하지만 이내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정수진은 현장 지휘관인 김석규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정수진은 맥주군과 교전하면서 원샷이라는 속전속결보다는 일명 베어먹기라는 확인사살 기법을 사용했다. 김석규는 그것이 바로 정수진을 백전백승의 여전사로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하며 다음에 군단장 표창이 내려오면 꼭 임봉식 부부를 추천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지원 무기인 주꾸미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으면서 전투는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김석규는 이대로 종전을 맞이하는 게 서운해서 임봉식에게 소주군 1개 소대만 더 투입해 달라고 입에다 손나팔을 만들어 긴급하게 무전을 날렸다. 마치 폭탄을 맞아 폐허가 된 전쟁터에 홀로 고립되어 아군의 보급을 애타게 기다리는 패잔병처럼 애잔한 모습이었다.


교신상태가 안 좋은 건지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임봉식은 거듭 딴전을 피워댔다. 그래도 김석규는 손나팔에 들릴락 말락 목소리를 실어 끈질기게 교신을 시도했다. 소주 일병, 소주 일병 오버. 다른 테이블의 연합군이 지켜보기에도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결국, 연합군 보기 부끄러워 그런 건지, 아니면 고래(古來)로 내려온 ‘지성이면 감천’ 식의 달콤한 열매였는지, 이윽고 임봉식이 아줌마를 불러 또박또박 교신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적의 보급로를 확보해주다 말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박미옥이 딸 지우를 대동하고 현장에 나타나자 임봉식이 돌연 사이다로 주문을 변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동정범 혐의를 쓰지 않으려고 돌변한 임봉식의 배신은 참으로 놀랍고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김석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몸을 벌벌 떨기만 했다. 적의 보급로가 겨우 뚫리려는 판국에 공습이 감행되다니!


박미옥은 빨치산 같은 김석규의 붉은 얼굴을 보고는 당장 불호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임봉식 부부 때문에 최대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박미옥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수진과 즐겁게, 아니 즐거운 척 사이다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눴다.


김석규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재빨리 반전시킬 전략을 모색해 보았다. 전황이 좋지 않다고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었다. 김석규가 누구던가. 역전의 용사가 아니던가. 결코, 이대로 물러설 김석규가 아니었다. 무책임한 퇴각은 군인의 기본자세가 아니다!  김석규는 최대한 지형지물을 활용하려는 작전에 ‘철 지난 집들이’를 끌어들였다.


“봉식아, 아직 우리 집에 안 와봤지? 구경이나 한번 하고 가라.”


“그럴까, 그럼?”


임봉식이 반색하며 덥석 미끼를 물고 정수진을 돌아다보았다. 정수진은 작년에 김석규가 이사했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직 들르지 못했는데, 만약 오늘 방문하게 된다면 빈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화장지나 식용유 같은 걸 사갈 수도 없고 어쨌든 미처 계획에 없던 일정으로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 종전선언을 할 거예요?”


야심 차게 구사한 ‘집들이 작전’이 차질의 조짐을 보이자 김석규가 하이에나처럼 비굴한 눈빛을 쏘며 정수진에게 반문했다.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닌다는 하이에나. 김석규는 추접스러운 하이에나가 되더라도 전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작전 구역을 벗어나는 순간, 교전 재개의 꿈은 수포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정수진이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었다. 종전선언을 종용하는 박미옥의 시선이 간절하게 날아갔지만, 정수진의 교전 재개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정수진은 맥주군과의 전투가 성에 차지 않아 내심 개전 재개를 바라던 참이었다. 만약 김석규의 제안이 없었다면 정수진은 귀가해서라도 남부끄럽지 않은 부부 전사가 될 작정이었다.


김석규의 아파트로 이동하기 전 정수진이 미리 교전 상대로 소주군을 단독 지명하고 적의 지원 무기로는 닭찜을 배정했다. 작전명 ‘조류독감 퇴치’는 정수진의 스마트폰을 통해 예하 치킨센터에 긴급 하달되었다. 박미옥이 중간에서 전쟁만은 막아보려 눈살도 찌푸려보고 별의별 안간힘을 다 써봤지만, 오랜만에 만난 정수진의 참전이 막판 변수로 작용하여 개전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때 은밀하게 김석규의 전화벨이 울었다. 김석규는 얼른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방금 강주에 도착했다. 지금 어디냐?”


백상호의 들뜬 목소리에서 참전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김석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박미옥에게 이미지가 좋지 않은 백상호가 나서게 되면 개전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에 비번일 때 볼까?” 김석규가 한 발 빼는 제안을 던지자, “한 잔 빨려고 부산서 엄청나게 밟아 왔구만.” 하고 백상호가 강하게 어필했다. 김석규는 어쩔 수 없이 ‘집들이 작전’을 누설하고 말았다.


아군들이 아파트에 주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의 주력부대와 지원 무기가 속속 도착했다. 수송은 ‘배달의 강주’가 맡았다. 배달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 걸맞은 신속배달이었다. 정수진은 남강주꾸미 전투에서 소극적으로 임한 게 부끄러워 인정사정없이 소주군을 저격해대기 시작했다. 원샷 원킬의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였다. 정수진의 맹활약으로 적 1개 소대가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딩동!

정수진이 또 다른 적군을 유인하는 찰나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박미옥이 인터폰을 확인해 보니 백상호가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박미옥은 뒷골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집에 찾아온 손님을 박절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제수씨. 이거 화장지입니다.”


백상호가 집들이 선물을 내밀며 하회탈처럼 웃었다. 박미옥은 인사치레로 잠시 미소 지었다가 다른 손에 들린 소주병들을 보고는 웃음기를 싹 지워버렸다.


하지만 김석규는 백상호의 참전으로 한껏 고무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김석규는 언제부턴가 양상사 혹은 주상사의 레퍼토리를 따라 하고 있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김석규에게서 시작된 노래는 임봉식으로 이어졌고, 정수진은 가사도 잘 모르면서 자신 역시 군인이라며 억지로 따라 불렀다.


그러자 적의 소주 병력이 결사항전, 옥쇄투쟁을 외치며 안전핀을 뽑아 들고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했다. 아예 병나발을 불라는 시위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아군들도 물러서지 않고 과감하게 소주병을 들었다. 술잔은 이제 용도폐기 되어 거실 구석에 뒹굴었다.


예상치 못한 자살폭탄조의 투입으로 전황이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었다. 군 미필자인 박미옥은 후방 안전지대에서 지우와 보해를 데리고 오렌지주스를 마셔가며 시시각각 전해지는 전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특히 당장에라도 그로기 상태가 된다 한들 이상하지 않은 김석규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어느덧 5개 소대 병력을 잃어버린 적의 주력군은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그렇다고 패주할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닭찜의 눈물겨운 지원을 받으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박미옥은 알카에다처럼 아예 뚜껑을 딴 채 진격하는 소주군의 자살폭탄에 자못 아군의 방어선이 무너질까 염려됐다. 그래서 손뼉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 전황이 유리할 때 백기를 흔들어 휴전하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참전용사들을 자극할 수도 있겠다 싶어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주군의 반격이 예사롭지 않았다. 전황은 백중세에서 점점 소주군의 우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뒤늦게 참전한 백상호의 고군분투와 임봉식 부부의 부창부수 선방에도 불구하고 김석규의 눈이 풀리고 코가 삐뚤어지는 악재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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