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서당 같은 걸 하나 하지 그래. 내가 전에부터 고민했던 문젠데 우리나라 초중등 교육은 학교에서 할 게 아니라 서당에서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사실 조선말에 설치된 소학교는 신분 차별이 없는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거였지만 일제 강점기에 그 명칭이 보통학교, 국민학교로 바뀌면서 완전히 뒤틀리고 왜곡되어 버렸지. 국민학교가 뭐냐?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 거 아니냐!
일제 잔재 청산한다고 해방 50년이 지나서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긴 했지만 진짜 청산하려 했으면 국민학교를 없애버렸어야 해. 이름 바꾼다고 그 본질이 어디 가냐? 일본 놈들 못된 버릇 이지메가 우리나라에 수입돼서는 왕따가 되고 독재 때는 애들 국민교육헌장 외우라면서 일제 못지않은 세뇌 교육에 열을 올리고.
아, 물론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냐. 하지만 돼지우리도 아니고 닭장도 아니고 그렇게 공장식 교육을 할 건 아니지 않겠어? 차라리 서당 같은 소그룹으로 전인교육을 도모하는 게 그나마 낫지.”
“그럼 좋지. 나 같은 백수가 동네 애들 가르치면서 보람도 찾고 말이야. 하지만 학교를 서당으로 돌리기에는 이미 교육도 산업이 되어버려서 안 돼. 기득권 쥐고 있는 자들이 돈벌이 내놓으려고 하겠어? 그리고 요즘은 우리 때처럼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 아니라서 학교 교육도 받아볼 만해. 우리 때는 한 반에 육십 명씩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이삼십 명만 있으니까.”
막걸리의 화력은 드세진 않으나 은근한 구석이 있어 그 저항이 만만찮았다. 그동안 쌓인 회포를 살랑살랑 부는 강바람에 날리며 막걸리 2개 소대를 섬멸했는데도 김석규는 후련하지 않고 오히려 전의만 불타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전투를 지속하고 싶은 충동이 분수처럼 샘솟고 있었다.
김석규는 전쟁광으로 변해가는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도처에 널려있는 적을 격퇴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의 미래, 나아가 우리나라의 미래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끊임없는 전투는 김석규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가정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이미 산전수전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휴전이나 정전, 또는 퇴각일랑 군인의 본분이 아니라며 본능적으로 마다하고 있었다.
“집사람이 지금 퇴근한다는데.”
불현듯 걸려온 전화에 임봉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이쯤에서 집에 가주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럼 난 어떡하고?”
김석규가 임전무식(臨戰無識)에 임전무퇴의 기세로 질문했다. 즉, 전투에선 유식한 놈보다 무식한 놈이 장땡이라는 우둔함과 더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배수의 진을 친 결연함이 버무려진 그런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어떤 악조건하에서도 자신을 수행하거나 인도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주꾸미 어떠냐?”
임봉식이 그 기세에 눌렸는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어쨌든 안색을 부드럽게 하며 물었다.
“나야 뭐.”
김석규가 슬쩍 얼버무렸지만 그건 주꾸미를 상대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상대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사실 폭탄주까지 투하된 어제의 야간전투, 그리고 상황버섯주와 벌였던 대낮의 교전, 이어진 막걸리와의 전투로 김석규는 영화 플래툰에서의 피도 눈물도 없는 반즈 중사처럼 전쟁광이 되어 이 적이냐 저 적이냐 따지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전쟁터에만 보내준다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전의에 불타는 임전무식꾼이 되어 있었다.
임봉식이 교전 장소로 ‘남강주꾸미’라는 옥호를 거론했다. 이제껏 섭렵한 주꾸미 식당 중에서 제일 잘하는 곳이라 아내와 자주 간다는 것이었다. 마침 위치도 김석규의 아파트 근처니까 전투 중 후송하기도 쉬울뿐더러 교전 후 이동하기도 쉽다고 그 사유를 밝혔다.
“위치가 마음에 걸리는데….”
조금 전의 충천하던 전투 의지는 어디로 갔는지 김석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불현듯 아내 박미옥의 도끼눈 레이저가 김석규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났기 때문이었다. 교전 장소가 집에서 가까운 만큼 도끼눈 레이저에 피폭될 가능성 또한 현저하게 높았다. 김석규는 이틀 동안 전투를 치르느라 얼굴색이 빨간 고무대야처럼 변해 있었다. 만약 박미옥에게 그 모습을 들킨다면 무사하리란 보장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안색이었다.
김석규는 임봉식의 아내 정수진을 대면하고 부끄러움에 치를 떨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적을 섬멸하는 애국 행위도 중요하지만 우선 몰골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쟁 영웅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근사하게 나오는 것이지 스크린 밖에서는 술꾼이나 알코올중독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석규는 교전 장소로 지목된 남강주꾸미까지만 함께 진군할 요량으로 정수진의 군용차량에 몸을 실었다.
“전투에 임하든지 집으로 퇴각하든지 마지막 결정은 적진 상황에 한 번 맡겨보자.”
김석규가 차량으로 이동하는 도중 임봉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막상 남강주꾸미에 들어서자 김석규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며 다짜고짜 안방으로 치고 들어갔다. 선제공격과 기선제압. 김석규의 고무대야처럼 붉은 얼굴에 염화시중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며 정수진은 문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그녀는 김석규가 퇴각할 거라고 오판한 모양이었다. 정수진이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박미옥에게 제보 전화를 넣었다.
“사돈어른 때문에 못 온다는데?”
한참을 통화하던 정수진이 잔뜩 목소리를 낮춰 결론부터 알려주고 계속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붉은 양념으로 도배된 주꾸미는 불판 위에 오르고 임봉식은 전선에 나설 것인지 퇴각할 것인지 빨리 결정하라고 김석규를 종용했다. 김석규는 천생 군인인 자신이 비겁하게 적을 피해서 도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골치가 아팠다. 또한, 이기건 지건 포화와 포연으로 자욱한 전쟁이 끝나고 나면 박미옥에게 뭐라 변명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교전을 서두르자. 군인이 전쟁 중에 뒤를 보일 수는 없는 법.”
김석규는 옛 드라마 <전우>의 소대장 나시찬에 빙의한 듯 비장한 톤으로 전투태세에 돌입해 주꾸미 지원을 받는 소주군과 치고받는 난타전을 벌였다.
붉었던 안색이 거무칙칙해져서 도중에 혼절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던 김석규는 정작 교전에 임해서는 명량해전의 이순신 장군처럼 물러서지 않는 강단을 보여주었다.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면서 임봉식의 얼굴도 어느덧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어 올랐다. 김석규의 선도 투쟁에 감동한 임봉식 역시 몸을 아끼지 않고 최전선에 나섰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정수진이 대뜸 김석규에게 총을 달라고 요청했다. 간호장교 출신의 정수진은 오늘만큼은 운전병이어서 교전수칙 상 전투에 나설 수가 없었으나 주꾸미 추가 지원을 받아 화력이 한층 보강된 적들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임봉식이 너무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김석규는, 부창부수구나! 감탄하면서 교전수칙 위반이라는 강수를 두며 현장지휘관의 직권으로 정수진에게 전투명령을 하달했다. 현장지휘관은 별도의 임명 절차를 거치는 게 아니라 전쟁비용을 계산하거나 계산할 의향이 있는 자가 맡게 되어 있었다. 김석규는 현재 총알이 다 떨어져서 계산할 능력은 되지 않으나 계산할 의향만은 누구보다 충만한 인원이었다.
“소주군은 아무래도 화력이 막강해서 여군이 상대하긴 힘드니까 우리에게 맡겨두고 수진 씨는 맥주군을 상대하세요.”
김석규의 명령에 정수진이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중무장할 수 있는데 여군이라고 차별받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