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블랙홀>
중후하고 선량한 인상의 택시기사는 김석규가 하차하자 새벽 출근길에 아내가 집어준 소금을 운전석 차창 너머로 힘껏 뿌렸다. 근무 중 진상 승객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거들랑 맞대응하는 대신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화를 삭이라고 아내가 신신당부했었다.
승객이 드문 토요일 낮 시간대. 택시기사는 백 미터 앞에서 손을 흔드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까 생각했었다. 흔들어대는 몸짓이 낮술을 한잔 제대로 걸친 사람 같아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승객도 아쉬운 판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차를 세웠다. 택시기사는 아내의 당부를 떠올리며 호주머니에 든 소금봉지를 손으로 확인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승객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역겨운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대체로 취객들은 꼭 뒷좌석 대신 조수석을 선호했고 쓸데없는 말들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승객이 혀 꼬이는 소리로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쯧쯧. 보아하니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 것 같은데 차라리 다른 직업을 구해보지 그래요? 요즘 택시 영업도 잘 안 된다고 하던데.”
택시기사는 자신보다 한참 젊은 승객의 무례에 기가 끅 찼지만 대꾸하다 보면 아내의 신신당부를 어기게 될 것만 같아 슬쩍 흘겨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남 같지 않아 걱정돼서 그럽니다. 걱정이. 쯧쯧.”
택시기사의 마뜩잖은 눈빛에 승객이 다시 혀를 끌끌 찼다.
“날 알아요?”
택시기사는 승객의 계속되는 무례에 기분이 몹시 나빴다.
“사장님을 알아서 걱정해 주는 게 아니라 요즘 택시가 어렵다고 하니까 노파심에 그러는 겁니다.”
“아, 그래요? 난 또 아는 사람인 줄 알았네.”
택시기사는 호주머니 속의 소금봉지를 손으로 쥐며 마음을 다스렸다. 승객은 계속 혼잣말을 주절댔지만 택시기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승객이 현금으로 택시비를 냈다. 택시기사는 현금을 받으며 한시라도 빨리 진상 승객이 내리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승객은 내릴 생각일랑 하지 않고 도끼눈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것이었다. 불현듯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택시기사의 뇌리를 스쳤다. 승객은 동전 세 개를 받자 그제야 천천히 하차했다. 택시기사는 차창 너머로 힘껏 소금을 뿌렸다.
“이보게 석규!”
군살 하나 없이 비쩍 마른 임봉식이 문화예술회관 쪽으로 올라와 반갑게 소리쳤다. 원래 마른 체형이 아닌데 작년에 치질 수술을 하면서 빠진 살이 다시 불지 않는다고 했다. 임봉식은 다섯 살배기 막내딸 보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한창때 동안의 대명사로 불렸던 임봉식은 야구모자까지 눌러썼지만 이제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임봉식은 룸펜 아닌 룸펜으로 햇빛을 잘 보지 못해 허여멀게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보해가 김석규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다가 취기에 핏발 선 눈과 마주치자 임봉식의 등 뒤로 냉큼 몸을 숨겼다. 새처럼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괜찮아. 이 아저씨는 항상 이래.”
임봉식이 보해를 안심시키며 앞으로 당겨보았지만 보해는 엉덩이를 쭉 빼고 버텼다. 보해의 작은 몸이 까치발에 의지해 버티는 모습을 보며 김석규와 임봉식은 동시에 껄껄 웃었다. 보해가 아빠의 웃음소리에 마음이 풀렸는지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봄날 싱그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김석규는 탄약통이 비교적 가볍긴 했지만 보해도 있고 해서 근처 실내전투장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문화예술회관 앞은 찻집들로 즐비했고 오후 시간대에 전투를 치를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김석규가 고심 끝에 넌지시 야외 전투를 제안하자 임봉식이 빈손을 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처분권을 행사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김석규는 지체없이 24시 마트에 들어가 만만한 교전 상대를 골랐다.
“대낮이고 하니까 아무래도 화력이 약한 게 낫겠지?”
임봉식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김석규가 막걸리 통을 집어 들었다. 막걸리는 전투력도 보잘것없지만, 특히 지원 무기가 부실해 그들이 만만하게 보는 적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물론 전투상황에 따라서는 홍어삼합 같은 중무장 병기가 지원되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막걸리의 지원 무기는 새우깡이나 꼬깔콘 정도였고, 재래식 무기로 풋고추나 김치가 있었다. 김석규는 지원 무기로 과자 서너 봉지를 지목했는데 그건 보해까지 염두에 둔 일석삼조의 포석이었다.
웅장하면서도 운치 가득한 문화예술회관을 배경으로 역사의 물길 남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원년 시월에 김시민 목사의 삼천팔백 관군이 이만의 일본군을 물리친 승리의 역사, 이듬해 계사년 유월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 6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며 관기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껴안고 투신했던 비운의 역사 모두를 깊은 강물에 담그고 남강은 소리 없이 흘렀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를 관통하는 평화로운 남강 둔치엔 많은 사람이 바람을 쐬러 나와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파워 워킹으로 힘차게 걷거나 택견처럼 설렁설렁 걷는 사람들, 벤치 또는 잔디밭에 앉은 사람들, 깔판 위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김석규는 등나무 그늘 벤치에 성큼성큼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임봉식도 보해를 데리고 뒤따라와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김석규가 과자 한 봉지를 집어 보해에게 건네주고 천천히 막걸리 통 뚜껑을 열었다. 바야흐로 전운이 감도는, 목에서 군침이 도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종이컵에 막걸리를 가득 장전시키고 사정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은 꿀꺽, 비명을 지르며 기분 좋게 산화했다. 이번엔 임봉식이 막걸리를 장전할 차례였다. 두 사람은 ‘걸터앉아 쏴!’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은 노리쇠 같은 목젖이 격발되자 다시 꿀꺽, 소리를 지르고 스러졌다.
“요즘 계속 집에만 있냐.”
막걸리 일개 소대를 섬멸하고 다음 소대를 불러들이며 김석규가 물었다. 물론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백수가 있을 곳이 집밖에 더 있겠는가. 다만 대화의 연결고리나 맥락상 어색함을 없애기 위한 고도의 장치와도 같은 질문이었다. 임봉식이 모래 장난질을 하는 보해를 지켜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주억거렸다.
“과외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임봉식이 사천에 거주할 당시 중학생 아들의 과외를 직접 맡았던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과외선생을 붙일 형편이 못 되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보단 임봉식이 하릴없이 집에만 있다 보니 느는 게 잠이요 남는 게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임봉식의 과외 실력이 아들의 성적향상으로 증명되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들 친구들의 엄마들이 과외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임봉식은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는데 사실상의 이유는 같은 아파트 아줌마들에게 백수처럼 보이는 것이 쪽팔렸기 때문이었다.
“바빠. 애 봐야 하고 집 치워야 하고. 시간 나면 컴퓨터 게임도 해야 하고.”
또 하나의 적군을 죽이며 임봉식이 정말로 바쁜 듯이 대꾸했다. 김석규는 진짜 바빠서라기보다 안 바쁘면 쪽 팔리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서, 막걸리와의 전승에 고무되어 평소 생각해둔 화제 하나를 툭 던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