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옥은 휴직하고 난 며칠간은 술을 마음껏 마시도록 방임하며 일단 김석규를 안심시켰다. 그런 다음엔 병원에 입원해서 편하게 술도 마시고 치료도 받아보자고 꼬드겼다. 하지만 김석규는 좀처럼 넘어오지 않았다. 병원 입원과 음주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는 경험칙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그래서 박미옥은 술을 줄이지 않으면 병원에 입원시킨다고 엄포를 놓는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김석규의 음주량이 줄어든 건 아니었다. 아니 시나브로 더 늘어나고 빈번해져 가고 있었다. 그나마 박미옥의 눈치를 본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 낮이었다. 가끔 뵙는 사돈어른을 모시고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된 김석규는 평소 마주칠 일이 없던 적과 조우하게 되었다. 바로 상황버섯주였다. 식당주인이 상황버섯 농장을 운영하는데 손님에게 서비스로 내어주고 있었다. 김석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어젯밤에도 전투를 치르느라 늦게 귀가했기 때문에 아내 박미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석규는 비록 아내의 도끼눈이 두려웠지만 적을 코앞에 두고 비겁하게 우회할 수 없어 두려움을 떨치고 주전자를 덥석 집어 들었다.
“어르신 이거 상황버섯 술인데 한번 드셔보세요. 아주 좋아요.”
“하하, 난 술 잘 못 하는데.”
술잔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돈어른이 손사래를 쳤다. 김석규는 이미 타오를 대로 타오른 교전의지를 꺾을 방법이 없어 막무가내로 사돈어른에게 술을 한잔 건넸다. 사돈어른이 마지못한 듯 잔을 받았다. 김석규는 부지불식간에 연합군이 된 사돈어른을 인간방패로 삼아 박미옥의 시선을 외면하며 술잔에 상황버섯주를 따랐다. 바야흐로 전선은 형성되었고 이제 치열한 전투만이 눈앞에 다가왔다.
상황군의 화력은 은근히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상황군은 후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리고기 안주의 지원 아래 만만찮은 전투력을 발휘했다. 김석규가 박미옥의 눈치를 받아 가면서도 ‘한 주전자 더!’를 외칠 정도였다. 원래 이 식당의 기조는 한 주전자밖에 서비스하지 않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입을 삐쭉댄 뾰로통한 얼굴로 한 주전자를 더 가져왔다. 김석규는 냉랭한 종업원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적과의 교전을 과감하게 전개해 나갔다. 박미옥이 사돈어른과 대화하는 틈을 타 속전속결 초전박살의 맹렬한 의지로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전자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김석규는 치열해지는 전투 속에서 차츰 광기를 발휘하고 있었다. 토요일 대낮이라는 시간대와 사돈어른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잊고 오로지 적을 섬멸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2차 교전 상대로는 뭐로 하지? 또다시 상황버섯주를 서비스로 달라고 하기엔 천하의 김석규도 낯이 뜨거워졌다. 조금 전 종업원의 뾰로통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박미옥의 눈치에 못 이겨 휴전하는 것도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전투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치열해져 버렸다. 김석규는 2차전 상대로 내심 찜해둔 ‘소주 일병’을 큰소리로 외쳤다.
“그만!”
박미옥이 사돈어른이 있는 자리임에도 결국 소리를 꽥 지르고 말았다. 사돈어른이 싸늘한 시선으로 김석규를 흘겨보았다. 김석규는 소주 일병과의 조우를 포기한다는 게 무척 힘들었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정신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계산대로 향했다.
김석규는 좋게 생각하자고 거듭 마음먹었다. 한신이 저자거리에서 건달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는 수모를 감수하며 후일을 기약한 것처럼 김석규도 박미옥의 호통에 아낌없이 굴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래도록 술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체력도 체력이지만 긍정적인 마인드 역시 중요하니까.
박미옥이 사돈어른을 모시고 집으로 가자고 할 때 김석규는 대낮 전투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술도 좀 깰 겸 동네 한 바퀴 돌고 가겠다고 말했다. 물론 박미옥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다. ‘술도 좀 깰 겸이 아니라 술도 좀 더할 겸이겠지.’ 하지만 사돈어른도 있는 자리라서 박미옥은 귀찮은 듯 손을 훠이 내저었다.
김석규는 제대로 된 교전을 한 번 더 벌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혼신의 연기력으로 나타나 박미옥이 속아 넘어갔다고 지레짐작하며 쾌재를 불렀다.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들어 백상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상호는 장거리 손님을 태우고 부산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오종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또 잠수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김석규는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임봉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벗글 오총사의 하나인 그는 문학을 접고 종교에 입문하여 한때 성직자로 봉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봉으로 생계 보전이 되지 않아 부득이 사업을 벌였는데, 사업이란 사업은 벌이는 족족 말아먹는 재주를 지녔다. 덕분에 그는 아내와 포지션을 바꿔 전업주부가 되어 있었다.
“봉식아. 뭐 하냐.”
평소 전화를 잘 받지 않기로 호가 난 녀석인데 웬일인지 수월하게 통화연결이 되자 김석규는 기분이 좋아 목청을 높였다.
“막내딸 데리고 문화예술회관 앞 둔치에 나와 있는데 바람이 참 좋다야.”
“그럼 오랜만에 전투 한판 벌여볼까.”
“애도 있는데 전투가 가능할까? 총알도 없고….”
임봉식의 말투에서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렇다고 전투를 회피하려 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가 있어 전투하기가 어렵다는 말인 듯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전투하고 싶어도 총알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백수에게 총알이 있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김석규는 얼른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 보았다. 충분히 1차전쯤은 가능한 총알이었다. 더욱이 실내가 아닌 야외로 적을 유인해낸다면 2차전까지도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총알은 넉넉하다!”
김석규가 호기롭게 외치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운전하는 개인택시였다.
“요즘 택시 영업 잘 안 되죠?”
진양대교에서 강변로로 접어들면 종종 차량 정체가 일어나는데, 아니나 다를까 택시가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 틈을 타서 김석규가 말을 걸었다. 택시 기사는 곁눈질로 김석규를 힐끔거리더니 짧게 대꾸했다.
“날 알아요?”
기가 막히는 반문이었다. 딴에는 요즘 택시영업이 좀 잘 되는 건지 어떤지 손님으로서 걱정이 되어 물어보는데 고맙다는 소리를 밑밥 깔 듯 깔지는 못할망정,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단답형으로 대답만 해주면 될 일을 까칠하게 언제 봤다고 그딴 걸 물어보냐는 식이었다. 아마 전쟁터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건 김석규의 눈빛이 택시기사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김석규는 건방지게 보이더라도 한번 대거리를 해줄까 고민하다가 휴전 중인 군인 신분임을 감안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사장님을 알아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요즘 택시가 어렵다고 하니까 물어보는 겁니다.”
“아, 그래요? 나는 또 아는 사람이라 그러는 줄 알았네.”
역시 기가 차는 답변이었다. 그래도 김석규는 마음을 추스르며 진짜 답변을 기다렸다. 택시 영업이 잘되는지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택시기사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흔히들 상대가 질문하면 대답을 해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택시기사는 잊어먹은 건지 무시하는 건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김석규는 기분이 엄청나게 상했지만 애당초 답변을 꼭 들어야 하는 그런 류의 질문이 아니라 툭 하고 무심코 던지는 질문이었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며 잠자코 앉아있었다.
택시영업이 잘 되고 안 되고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저 나는 잔돈만 잘 챙겨 가면 되지. 김석규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택시기사의 행동을 지켜보며 조수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택시비 잔돈을 챙기지 않았지만 오늘은 택시기사의 말본새에 기분이 나빠져서 김석규는 백 원짜리 동전 세 개가 손에 쥐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