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블랙홀>
나는 순간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것도 아니고 도반의 대접을 받는다는 게 인간으로서 할 짓인가 싶었다. 그만큼 도반의 현실은 참담했지만 나는 술기운에 힘입어 슬그머니 미안함을 눙칠 수 있었다.
“우리 둘만 먹는 것보다 백수 선배 불러 같이 먹을까.”
도반의 제안에 나는 흔쾌히 목이 부러지도록 주억거렸다. 얻어먹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면 부담감을 반감시킬 수 있었다. 또, 평소 얻어먹기만 하는 백수 선배가 오늘은 술값을 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화를 안 받는데.”
도반이 투덜대면서도 재차 전화를 걸었다. 선풍기는 씽씽 잘만 돌아가고 있었다. ‘전화 안 받으면 우리끼리 가자’고 내가 말했지만, 도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깐만 형수한테 전화해 보고’ 하더니 다시 번호를 눌렀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마치 청진하듯 진지한 표정을 짓던 도반이 잠시 후 입꼬리를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여보세요. 뭐? 야구 하러 갔다고? 아직 식사 안 했죠. 그럼 동네 삼겹살집에서 봐요.”
도반이 발가락으로 선풍기를 눌러 끄더니 ‘가자’ 하고 일어섰다. 나도 검은 비닐봉지를 챙겨 들고 뒤따라 일어났다.
“술친은 뭐고, 도반은 또 뭐냐?”
택시 안에서 도반이 물었다. 도반은 택시기사가 되고 나서 택시만 타고 다녔다. 돈이 없으면 차라리 걸어 다닐망정 절대로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걸 도반은 일제 강점기 때의 물산장려운동과 같은 심정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거창하게 표현했는데, 어쨌든 도반이 지독하게 택시를 사랑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술친은 말 그대로 술친구, 도반은 함께 도를 닦는 벗.”
“그럼 전에는 내가 친구도 아니고 달랑 술친구였단 말이야.”
“술친구는 술과 친구의 합성어인데 친구보다는 술에 방점이 찍혀있어. 사람 사이의 진정성은 없고 오로지 술을 위한 관계지. 하지만 우리 둘이 꼭 그랬다는 건 아냐. 다만 도반을 설명하기 위한 하위개념을 잡다 보니까 친구보다는 술친이란 단어가 더 근사해서 그런 것뿐이야. 여기서 중요한 건 도반이라는 개념이니까 술친이란 표현에 신경 쓰지 마.”
“개똥철학 나오니까 머리 아파지는데.”
“좀 있다가 술 한 잔 마시면서 들어 보면 이해가 될 거야. 우리의 두뇌는 음주상태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김영승 시인이 쓴 ‘반성’ 연작시에 이런 게 있다. 술에 취하여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그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수첩에 써놓은 글씨가 보였다.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고.
삼겹살집으로 들어가 도반이 주문하는 동안 나는 검은 비닐봉지를 풀었다. 그리고는 먹다 남은 막걸리를 물컵에 부어 원샷으로 들이켰다. 다시 얼굴 쪽으로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곧이어 상이 차려졌고 삼겹살 오인분이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탁자 위에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구운 고기를 먹기 좋게 가위로 잘라놓고 있을 때 백수 선배의 아내가 딸과 함께 들어섰다. 단아한 모습을 지닌 백수 아내는 슬로우 스타일이었고, 새침데기 딸은 뭘 하는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딸은 엄마가 챙겨주는 고기를 날름날름 받아먹는 와중에도 손가락으로는 열심히 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술친은 속세에 있고 도반은 출가한 사람이야. 즉, 술친은 현실에 안주해서 술을 마시고 도반은 현실을 초월해서 (물론 남들 눈엔 등한시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음주하는 존재라 할 수 있어.”
나는 막걸리를 다 마시고 소주를 탐하기 시작했다.
“많이 먹어라. 오늘 새벽까지 일했다. 돈 좀 벌었어.”
도반이 내게 양껏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미안해지려는 마음을 가누며 계속 말했다.
“내가 자네에게 절교를 선언한 건 우리가 술친구였다는 방증일세. 술친구는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거든. 물론 술친구 이전에 이미 친구니까 어느 정도의 무례는 우정이란 이름으로 용인되겠지. 하지만 그게 도가 지나치면 서로 정이 떨어지고 급기야 등을 돌리게 되는 거야.”
“자네 역시 내가 볼 땐 도가 많이 지나쳤었어. 하지만 내가 언제 그걸 탓한 적 있었냐?”
도반의 얼굴에서 여유가 묻어나왔다. 내 눈이 정확했다는 증거였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도반과 술잔을 부딪쳤다.
“술친은 단순히 음주하는 사람이야. 술을, 음주를 그냥 평면적으로 대하는 단계지. 현상으로 보는 거야. 그 이면에, 그 상층부에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술이 좋아 마시는 거야. 그러니까 술친이 취해서 고성방가하고 필름 끊기고 나를 귀찮게 하면 우선 보기 싫은 거야. 왜냐하면 술친끼리는 이차원에 있으니까. 그래서 술을 신사적으로 먹어야 하는 사이인 게지. 젠틀하게 마셔야 사람대접받게 돼.”
“그래, 술친은 이제 뭔지 알겠고, 도반이나 설명해봐라.”
“도반은 말이야. 좀 전에 술친을 설명할 때 눈치 긁었겠지만 완전히 그 반대지. 술을 도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사람이야.”
“그럼 내가 도인이냐?”
“도인인지는 모르겠고 어쨌든 술을 단순한 음주 단계에 놔두지 않고 수행의 한 단계로 인식해서 행하고 있다는 거야.”
“술친이었다가 도반이 되었다? 어쨌든 갖고 놀다 제자리나 갖다 놔라.”
백수 아내와 딸은 된장찌개를 시켜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은 촐랑거리며 먼저 식당 문을 나섰고 백수 아내는 정중하게 인사한 다음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대형마트에서 캐셔로 근무하는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백수에게는 과분한 여성이었다.
“돈도 없을 텐데 백수 가족 식사까지 챙기냐?”
“어차피 백수 선배 부르려고 전화했는데, 없으면 가족이라도 불러 대접해야지.”
나로 말미암은 자리에서 도반의 지출 규모가 커진 것을 염려했지만 도반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는 다시 한번 내 안목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내가 자넬 술친에서 도반으로 격상시킨 이유가 있어.”
“뭔데?”
“첫째 내가 음주를 수행의 한 단계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러다 보니까 비로소 자네가 보이기 시작한 거야. 그전 같으면, 다시 말해서 술친이었으면 내가 자네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일이….”
“무슨 일?”
“술 때문에 패가망신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래도 여전히 자넨 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걸 내가 비로소 보게 된 거야.”
“내가 술 못 끊는 건 다른 거 없어. 소견머리가 없어 그런 거지.”
“단순히 소견머리 없다는 걸로는 설명이 안 돼. 내가 질문할 테니까 진지하게 대답해 보라고.”
내 말에 도반이 정색하며 인터뷰이처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술을 마시는 이유가 뭐지.”
“술을 마시는 이유라?”
도반이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골똘히 생각했다.
“술이 있으므로 술을 마시는 게 아닐까 생각해.”
“산이 거기 있어 산을 오른다는 어느 등반가의 말이 떠오르는군.”
“그걸 아주 조금 패러디했어.”
도반이 오른손 검지 한 마디를 까 보이며 눈을 찡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