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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갑 Sep 14. 2024

양상사 혹은 주상사 - 1

연재소설 <블랙홀>

오후 들어 겨울비가 내렸다. 현대식 건물로 지어 올린 경찰서 앞마당에 수령이 삼백 년이나 되는 늙은 은행나무가 비에 젖고 있었다. 우람한 은행나무의 가지 끝에는 샛노란 잎들이 드문드문 매달려 있었다. 그 아래 보도블록이 깔린 바닥은 지천으로 떨어진 은행잎들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별관에 자리한 형사팀 사무실은 귀를 씻어내기 좋을 만큼 아주 조용했다. 별관의 형사팀은 2팀과 3팀이 있는데 2팀은 강력범죄 전담이고 3팀은 폭력 전담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호가 난 동네 양아치 하나 때문에 별관 사무실이 시끌벅적했었다.


양씨 성을 가진 양아치는 상사라는 별명을 지녀 양상사로 불렸다. 양상사는 또한 대단한 주사꾼이기도 해 종종 주상사라 불리기도 했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는 버스터미널과 지하상가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전형적인 양아치였다. 본인 말로는 나이가 쉰 살쯤이라고 하는데 얼핏 봐도 예순은 넉넉히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흐린 날에 날궂이한다고 아침부터 술에 취한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지하상가에 나타났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는 중앙통로에 술병을 차고앉아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러제꼈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사람들은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알지 못했다. 18번이 늙은 군인의 노래라 혹시 퇴역 군인이 아닐까 짐작하면서 상사란 별명을 붙여줬지만 어쨌든 그건 추측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는 버스터미널 근처 허름한 여인숙에서 숙박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터미널 주변에서 노숙했다. 그러면서도 술은 꼭 찾아서 마셨다. 마치 나비가 꽃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에게 술이 떨어지는 날은 없었고 덕분에 사건․사고도 액세서리처럼 붙어 다녔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연행되어 올 때는 함께 술을 마시던 노숙인을 폭행한 피의자 신세였고, 지하상가에서 붙잡혀 올 때는 관리사무소 직원이나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폭행당한 피해자 신세였다. 그건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힘이 약해서 당한 게 아니라 약삭빠르고 비상한 두뇌회전의 결과였다.


지하상가에서 호가 난 양상사 혹은 주상사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인들도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하며 양상사 혹은 주상사를 애써 외면했다. 대신 지구대나 동사무소,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양상사 혹은 주상사를 치워달라고 요청했다. 지구대나 동사무소에서는 다시 관리사무소에 민원신고를 이첩해 버리니 양상사 혹은 주상사를 최일선에서 맞이해야 하는 건 오로지 관리사무소의 몫이었다.


덩치가 작은 지국창 소장은 떡대 같은 직원 두 명과 함께 사무실을 나서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죽치고 있는 곳으로 갔다. 지국창은 얼마 전에 부임하여 양상사 혹은 주상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데다, ‘월요일 아침부터 별 같잖은 놈 하나 때문에’라며 잔뜩 부아가 치민 상태였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는 늙은 군인의 노래를 연속해서 돌림으로 부르고 있었다. 음정, 박자, 볼륨을 무시하고 불러 젖히니 듣는 귀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지국창이 뒷짐을 쥔 채 떡대 하나에게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그만 좀 하세요!”


떡대 하나가 앞에 나서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는 음정, 박자, 볼륨만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남의 고함소리도 무시하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 가세.


“아, 그만 좀 하라니까!”


화가 난 떡대가 양상사 혹은 주상사의 양쪽 겨드랑이를 파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릴 것 같았던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전광석화처럼 떡대의 명치를 이마로 때려 박았다.


물론 그게 양상사 혹은 주상사의 정확한 노림수였는지, 떡대에게 끌려 올라오던 양상사 혹은 주상사의 이마가 공교롭게도 명치쯤에 이르렀을 때 고개를 든다는 것이 타격으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떡대는 정확하게 명치를 얻어맞고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지국창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한 걸음 물러서더니 다른 떡대를 채근했다. 다른 떡대는 가지고 있던 경비봉으로 양상사 혹은 주상사의 등짝을 후려쳤다. 그러자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데굴데굴 굴렀다.


“사람 잡네! 이 떡대가 사람 잡아!”


 양상사 혹은 주상사의 오버 액션에 단단히 뿔 난 떡대가 오른발을 높이 들었다. 떡대의 발에는 항공모함 같은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항공모함은 떼굴떼굴 구르는 양상사 혹은 주상사를 콱 밟아버리려고 정조준하는 중이었다. 지국창이 잽싸게 달려가 온몸을 던져 항공모함을 막아섰다.


애당초 계획은 윽박과 겁박으로 양상사 혹은 주상사를 지하상가에서 쫓아 보내는 것이었지, 욱 하는 기분에 잘못 패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한동안 시달릴 일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워밍업 된 떡대를 겨우 진정시킨 지국창은 평소 친분이 있는 형사3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는 제대로 술기운이 올랐는지 로봇청소기처럼 바닥을 굴러다니며 갖은 비명을 질러댔다.


날씨도 꾸물꾸물하는데 형사3팀에 지국창과 떡대 같은 직원 두 명, 그리고 태우면 한줌 재만 남을 것처럼 바짝 마른 양상사 혹은 주상사가 들어섰다. 양상사 혹은 주상사는 입에 모터를 장착한 듯 연신 자신을 건드린 떡대를 정식으로 고소한다고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부르는 톤으로 음정 박자 무시하고 소리쳤다. 강력전담 형사2팀의 팀원들은 심심하던 차에 좋은 구경거리라도 난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개나 소나 맘껏 처먹게 내버려 두니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지. 저래서 술 마시는 것도 자격증을 줘야 해.”


형사3팀장 민완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김석규에게 말했다.


준수한 용모의 민완구는 술자리에서도 매너가 좋기로 소문이 나 음주자격증이나 면허증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취득할 역량이 되는 사람이었다. 형사3팀은 팀원들도 팀장의 성향에 좌우되는지 회식이 있어도 가급적 1차에서 끝내고 부득이하게 2차를 가더라도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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